오피니언 > 사람들

성이랑

윤복순 윤약국약사

어제 내가 받은 직함이 뭐지 하며 성이 들어온다. 친구들에게 자랑을 하려고 했는데 생각이 나지 않아 못했다고 한다. 나이를 먹으면 가지고 있던 직분도 다 내려놓는데 당신은 그 나이에 직위를 얻었으니 가문의 영광이 아니냐고 호들갑이시다.

흔히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감투 쓰는 것을 좋아한다. 한번 국회의원을 하면 평생 의원님으로 통하고 퇴직을 해도 현직에 있을 때의 직책으로 불린다.

성은 매주 이번 일요일에는 뭐하냐고 묻는다. 여름에는 거의 밭에 일하러 가고 농사가 끝나면 여행을 다닌다. 때때로는 아들딸이 오기도 하지만. 당신은 나만큼 많이 걸을 수 없어 같이하지 못함을 항상 아쉬워한다.

지난 일요일에는 김치파티에 갔다. 성이 당신도 가면 안 되느냐고 묻는다. 대환영이라고 했다. 어린아이가 엄마 따라 가는 것만큼이나 좋아한다. 나랑 같이 한다는 마음에 얼떨결에 간다고 하고선, 당신이 가는 것이 객쩍은 짓이 아니냐며 걱정을 한다. 성도 회원이라고 했다.

나는 성한테 많은 사랑을 받는다. 성은 시시때때로 제철 과일과 채소 등을 사주고, 당신이 누구한테 대접받은 식당의 음식이 입에 맞으면 꼭 나를 데리고 가서 같이 먹는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나를 도와주거나 내게 호의를 베푸는 사람까지 좋아하고, 나랑 친하게 지내는 이들에겐 나를 대신해 밥을 사주고 선물을 주기도 한다. 나한테 잘 해 줘서 고맙다고. 나는 당신에게 해드리는 것도 없는데.

김치는 임실에서 담갔다. 재료는 모두 그 집에서 키운 것이고 젓갈도 직접 담근 것이다. 그녀는 매년 자기 집에서 전북의 회원들을 불러 김장을 한다. 나는 올해 처음이다. 임실은 전라북도 임실군이 아니라 강원도 임실군 이라고 할 만큼 기온이 강원도와 비슷하다.

그래서 배추고 고추고 다 맛이 좋다. 그걸 아는 성이 김치를 살 수 있으면 사려고 같이 가고 싶다고 한 것이다. 김치맛이야 말해 무엇하리. 그녀의 정이 양념으로 들어가 회원들은 매년 김장하는 날을 기다린다.

임실까지 가는 길은 단풍이 절정이다. 김장하러가는 것이 아니라 단풍놀이 가는 기분이다. 성이 예쁘다, 예쁘다를 연발한다. 얼마나 좋은지 ‘가을이라 가을바람 솔솔 불어오니’ 노래를 부른다. 모시고 오길 참 잘했다.

성은 음악을 좋아한다. 가끔 당신이 젊은 시절 불렀던 노래가 가물가물하다고 해 내가 컴퓨터에서 찾아 가사를 적어준다. 성한테 배워 나도 가곡 몇 곡은 흥얼흥얼할 정도는 되었다. 약사합창단에서 부른 곡의 악보를 드리고 같이 부르기도 한다.

성은 혼자 살고 성직자로 대학병원의 과장으로 퇴직을 했다. 책과 여행을 좋아하는데 지금은 혼자서 다니기엔 힘이 부친다. 나만큼 젊으면 좋겠단다. 나와는 열한 살 차이가 난다. 필리핀과 중국 곤명을 모시고 갔고 청산도도 같이 했다. 당신이 나를 친동생이나 진배없다고 생각하듯 나 또한 그렇다.

김장은 오전에 끝났다. 240포기나 되지만 미리 준비를 다 해놓았고,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절반은 한 상태였다. 회원도 많다보니 쉬 마감지을 수 있었다.

점심 먹고 회의시간이었다. 성이 처음 갔기에 소개가 필요했다. 내가 익산의 회원이라고 말하려는데 모 언니가 어느새 자문위원이라고 소개를 한다. 언니의 순발력은 아무도 못 따라간다. 회원보다는 자문위원이 성에게 훨씬 어울린다.

돌아오는 길에 성이 팔자에 없는 자문위원도 해 보고 기분 좋다고 한다. 나는 장난기가 발동해 명패 하나 만들어 들릴까요? 하니, 명패보다 완장을 차고 싶단다. 마치 완장을 찬 듯 팔을 힘차게 흔든다.

작부 부월이 임종술에게 한 말을 몇 마디 생각나는 대로 읊었다.

“눈에 뵈는 완장은 기중 벨 볼일 없는 하빠리들이나 차는 게여. 지서장이나 면장, 군수가 완장 차는 꼴 봤어?”

“자문위원한테 하는 말버릇 쪼깨 세탁혀야 쓰겄다. 어디다 대고 함부로 핫질 핫질이냐?”

성과 나는 윤흥길의 ‘완장’ 대목을 주고받았다. 우리는 죽이 맞는다.

며칠 전이다. 성이 뜬금없이 전화로 “얘 너 오늘 점심 약속 있니?” 서울말로 묻는다. 둘 다 웃음이 터졌다.

“성 서울 갔다 왔어?”

“아니다. 서울 사람하고 통화 좀 했다.”

어릴 때, 동네 사람들이 서울에 가는 것은 요즘 외국여행 가는 것보다 어려웠다. 나는 대학시험 보러갈 때 처음 서울 땅을 밟아보았다. 서울에 갔다 온 사람은 이랬니 그랬니 하며 서울말을 했다. 서울 다녀왔다는 것을 과시하기라도 하듯. 이런 기억을 공유하고 있기에 한바탕 웃었다.

성과 나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 웃는다. 실컷 웃고 나면 성은 손을 내밀며 돈을 내놓으라고 한다. 그래서 또 웃는다. 웃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는데, 억지로라도 웃으라고 하는데, 거의 매일 약국에 들르는 성은 항상 웃을 거리를 가지고 온다. 성 덕분에 건강하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김장이 일찍 끝나 사선대에서 가을 햇빛을 받으며 걸었다. 가을이 주는 정취가 마음을 편안하고 넉넉하게 한다. 나 때문에 좋은 사람들 알게 되어 성이 많이 행복하단다. 날씨 좋지, 경치 좋지, 맛있는 김치도 한 통 얻었지, 뭐가 부럽겠냐며 당신만큼 행복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한다. 일요일 하루를 성과 함께 보냈다.

성이 자문위원 턱을 내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묻는다. 나에게 근사한 점심을 사겠다는 뜻이다. 성한테 맨날 받기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