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시민 유 성 무 

20년 쯤 전에 조선 후기 거상 임상옥의 일대기를 그린 드라마 <상도(商道)>를 재미있게 봤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도 흑백TV 시절에도 임상옥을 다룬 드라마가 있었던 것 같다. 임상옥의 배짱, 상술, 철학 등을 멋지게 그려낸 작품이었다.

임상옥의 이야기는 최인호의 소설 <상도>를 필두로 다양한 자기계발서에서 다뤄졌다. 그의 캐릭터가 흥미로운 점은 상인으로서 대성하고 말년에 엄청난 부를 사회에 환원한 데에는 확고한 철학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발이 세 개인 솥 정(鼎)자의 비의(秘義), 계영배(戒盈杯)의 교훈, 자신의 문집인 가포집(稼圃集)에 남겼다는 문구 ‘재상평여수 인중직사형(財上平如水 人中直似衡)’ 등....

소설과 영상 속에 나오는 임상옥의 이야기 중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탁월한 전략으로 동북아 무역계를 호령한 기업가였고, 사업가들을 양성한 후원자였으며, 많은 구호활동을 벌인 사회사업가였던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불법과 갑질로 지탄받는 재벌과는 궤를 달리하는 거인이었으니, 참으로 매력 있는 인물이다.

자신에게 접근한 홍경래와의 관계를 풀기 위해 임상옥은 과거에 스승으로부터 받은 솥 정(鼎)자의 풀이를 추사 김정희에게 부탁했다. 김정희는 부와 권력, 명예의 균형을 잃으면 재앙을 부른다고 풀이해줬다. 임상옥은 사업가로서 자신이 지켜야 할 한계를 인식함으로써 멸족의 위기를 넘겼다.

계영배는 어느 정도 잔이 술이 차면 아무리 부어도 빠져나가게 만들어진 잔이라고 한다. 즉 오래 전부터 과욕을 경계하는 상징적인 물건인데, 임상옥은 늘 계영배를 갖고 다니면서 욕심을 다스렸다. 결국 계영배로 인해 조정으로부터의 크나큰 위기를 모면했다.

일세를 풍미한 거상 임상옥의 진면목은 재상평여수 인중직사형(財上平如水 人中直似衡)에서 드러난다. 재물은 공평하기가 물과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 임상옥이 드라마틱한 삶에서 체득한 경영철학의 정수라고들 평가되는데, 이 문구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고 한다.

재물은 공평하기가 물과 같다는 말부터 생각해보자. 나는 이 말이 수평을 유지하려고 하면서도 끊임없이 모이고 흩어지면서 결국 큰 강을 이루고 바다로 흘러가는 물의 속성을 의미하는 중의적 표현이라고 본다. 즉 세상은 경제적으로 공평함을 원칙으로 해야 한다는 정의론과 함께 재화의 역동적 순환을 통해 경제를 생육해야 한다는 기능론을 함축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는 문구를 보자. 임상옥의 일대기는 ‘장사는 이윤을 남기는 게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이다’라는 명대사처럼 사람과의 신뢰 네트워크 속에서 장기적 관계를 구축하고 인재를 발굴하여 양성하는 과정으로 그려진다. 돈이 아닌 사람을 목적으로 할 때 사업을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의 무역은 관이 통제했으니, 독점적 무역권을 확보하기 위한 상단들 사이의 경쟁이 매우 치열했을 것이다. 조선말 세도정치가 판을 치던 세상에서 임상옥이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인삼독점권을 확보한 점을 볼 때, 그가 세도가들과 적당한 정경유착 관계를 구축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야기가 가슴에 와 닿는 것은 소설가와 연출자의 상상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최근 우리나라 경제가 매우 어렵다고들 한다. 물론 글로벌 경제 침체와 무역전쟁, 4차산업기술에서 촉발된 거대한 산업구조 변화기, 인구구조 변화 등에서 기인함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나는 더 구조적인 문제가 우리 경제를 옭아매고 있다고 생각한다.

경제는 기본적으로 혁신을 통한 기업 성장을 추구하는 도전정신과 사회적 책임의 균형을 추구하는 기업가정신을 통해 활성화된다. 하지만 최근 속속들이 드러나는 재벌기업들의 추악한 민낯에서 ‘재상평여수 인중직사형’과 같은 기업가정신을 찾아볼 수 없다. 잘 되면 그들만 배부르고 안 되면 국가경제가 위협받게 되는 구조니, 어찌 우리 경제가 전진할 수 있겠는가?

창조적 파괴라고 일컬어지는 혁신은 단순히 기술혁신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현대적 의미의 혁신은 기업조직과 사회가 유기적으로 협력하면서 공진화함으로써 지속가능성을 확보할 때 비로소 이뤄진다. 국내외 기업들의 흥망성쇠의 역사를 보면, 단순히 세계 최초·세계 최고의 기술만으로 성공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합종연횡하면서 치열하게 싸우되, 기업시민으로서 최소한의 기업윤리를 지키면서 국가와 사회, 이해관계자들에게 공헌한 기업들이 살아남았다. 미래 기업 환경에서는 탈법으로 총수 일가의 지배권 강화에 목매고, 노동자와 협력업체 등 약자에게 갑질하며, 치명적인 제품 결함을 숨기는 기업들이 발붙일 곳이 없다. 이런 기업들은 한 때 반짝할 수는 있을지언정 결코 오래 갈 수 없다.

4차산업기술들이 기회이자 위협인 이유는 기존의 업(業)에 대한 영역을 허물고 경쟁구도를 바꿔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업은 오픈 플랫폼으로서 소비자는 물론이고 협력자를 지속적으로 유인할 수 있어야 변화에 빠르게 대응함으로써 생존하고 성장할 수 있다. 우리나라 재벌기업들이 임상옥의 지혜를 되새겨야 할 이유다.

재상평여수 인중직사형. 이 10자 속에 새로운 경제 환경에서 우리 기업들이 살고 우리 경제가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생각한다. 부정한 욕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려고 노력함이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