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복순 윤약국약사

일주일을 설레었다. 작년에도 거의 성사될 뻔했다가 취소되었다고 한다.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가지 않겠다는 후배를 꼬드겨 참가하기로 했다.

공연을 진행하려고 하는 출연자는 공연 안전을 위해 출연자가 지켜야 할 마음가짐 및 공연 안전에 관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 수료증을 제출해야 입장할 수 있다. 나 같은 컴퓨터 울렁증환자는 미리 겁을 먹는다. 회원가입을 하고 교육받는 방법 등을 스마트폰에 상세하게 올려놓았다. 나는 휴대폰도 없다. 노래도 제일 못하면서 그 무대에 서고 싶은 욕심은 누구보다 크다.

후배에게 내 수료증까지 부탁했다. 개인정보가 들어가야 하고 수강시간도 1시간이 넘는다. 시험도 봐야 한다. 그녀가 점심시간을 이용해 회원가입을 해주고 강의 들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갔다.

네 단원이다. 첫 단원을 끝내고 두 번째로 넘어가려니 어떻게 하는 줄을 모르겠다. 이리저리 해보다 전화를 했다. 온 힘을 다해 끝내고 시험까지 봤다. 손이 덜덜 떨렸다. 90점이다. 수료증이 화면에 뜬다. 해냈다는 것과 무대에 설 수 있음에 박수가 쳐졌다.

수료증을 내 문서에 저장하고 출력을 하려니 되지 않는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끙끙 앓고 있는데 마침 학생이 약을 사러왔다. 그가 호기롭게 도전해 20여분을 실랑이 했지만 허사였다. 혹시 몰라 바탕화면에도 수료증을 저장했다. 안전교육 받으면서 시간이 남들보다 두 배나 걸리고 수료증이 출력되지 않아 애달은 생각을 하니 더욱 서고 싶다.

다음 날 Y제약회사 직원에게 전화했다. 익산에 오면 우리 집에 들러 해결해 달라고, 늦게라도 오겠단다. 초조하게 기다리는데 잘도 오던 제약회사 직원들이 그날따라 아무도 오지 않는다.

학생이 하지 못한 걸 보면 쉬운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살아보니 모든 문제는 해결되게 돼 있다. 시간이 걸릴 뿐이다. 내일 하루 여유있다. 조금 느긋해졌다. 그때 제약회사 직원이 온다.

“저 컴퓨터학과 나왔어요” 예쁜 것은 예쁜 짓만 한다. 전공자도 시간이 걸리니 마음이 다급해졌다. ‘안 돼? 소리문화의 전당 명인홀은 아무나 서지 못해. 나 거기 서면 가문의 영광이야. 작년에도 전북약사 칸타빌레 합창단이 공연하려 했는데 못했어. 올해 간신히 된 거야. 수료증 없으면 입장도 못해’ 거의 울부짖었다.

“영 안 되면 휴대폰에 찍어가지고 가세요” 어제 내가 얼마나 시간 투자했는데... 한~참 뒤에 수료증이 나왔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허가증이라도 받은 양 수료증에 음음음 입을 맞추며 나도 설 수 있다고 크게 외쳤다.

드디어 공연 날, 일요일이다.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오후 4시까지 공연장에 가면 된다. 원광대 수목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깊어가는 가을의 색깔이 참 곱다. 나 혼자다. ‘나무들아 나 오늘 합창공연 한다. 명인들만 설 수 있다는 명인홀이야. 노래 못 불러도 좀만 들어줘’ 옛날에 노처녀가 시집을 가게 됐는데 어디다 자랑할 데가 없어 강아지한테 했다고 하더니 내가 그짝 났다. 조수미도 해보지 못한 수목원 무대에 섰다고 맘껏 객기를 부렸다.

공연장에 가면서 어떻게 무대에 서게 됐냐고 물었다. 1년 내내 연습하러 가지 않아 자초지종을 모른다. “뮤즈 성악 앙상블 정기연주회”에 찬조출연 한다는 것이다. 뺨을 맞더라도 금가락지 낀 사람한테 맞으라고 했는데 취미생활 하는 사람들의 무대인가. 한껏 부풀었던 마음이 풍선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오래 전 무용학원에서 약사들끼리 살풀이춤을 배웠다. 그 선생 발표회 때 찬조출연 한 적이 있다. 나를 위한 관객은 한 명도 없었고 미미한 하나의 점이었던 생각이 나 지금까지 가문의 영광이니 뭐니 한 것들이 머쓱했다.

출연자들의 프로필을 보니 음대 졸업생들로 시립합창단 단원들이다. 몇 명이서 매년 연주회를 연다고 한다. 그들은 드레스부터 프로의 맛이 났다.

공연이 시작됐다. 합창은 맨 끝이다. 중간까지 그들의 공연을 보기로 했다. 소프라노 넷, 테너 한 명이다. 고음이 잘도 올라간다. 나는 고음 부분에선 화음을 깨지 않으려 소리는 내지 않고 입만 벌린다. 그리고 웃는다. 우리합창단의 실력이 달릴 것 같다. 별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마음을 들키기라도 한 듯 얼굴이 화끈거렸다.

지휘자 선생님은 나에게 웃기만 잘하면 된다고 했다. 입을 크게 벌리고 생끗 생끗 웃으며 노래 부르니 가끔 “언니가 제일 잘 해” 이런 말을 듣기도 한다. 오늘은 약사들 앞에서 부르는 게 아니라 성악가들 앞이 아닌가.

음악 감독은 합창단의 리허설을 보고 “프로”라는 평을 해줬다. 지휘자 선생님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짐작이 된다고도 했다. 우리는 무대에 설 때마다 서로서로 “잘하게”를 다짐한다. 지휘자님도 웃으며 OK사인을 하셨다. 나도 노래의 맛까지는 어림도 없지만 가사는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솔로 듀엣 3중창뿐이었는데 우리가 합창으로 무대를 꽉 채워줬으니까. 약사라는 사회적 지위도 있으니까. 아마추어지만 그들의 체면은 세워준 것 같아 윈-윈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 곡은 출연자 모두가 에델바이스를 불렀다. 2절은 객석도 같이했다. 마지막엔 나도 제법 여유까지 부렸다.

퇴근시간 무렵이다. 우리 아파트의 젊은 아저씨가 “브라보 에델바이스”하며 약국에 들어온다. 뻥 하는 내게 그날 공연 잘 봤단다. 관객은 거의 출연자들과 연관이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어떻게? 그는 음악을 좋아해 소리문화의 전당 1년 입장권을 사, 보고 싶은 공연이 있을 때는 연차를 쓴다고 한다. 태평소 연주자다.

솔리스트들도 약사냐고 묻는다. 그들은 음대를 졸업한 성악가들이라고 하니 “어쩐지”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약사들도 잘 하더라는 말은 한 마디가 없다. 윈-윈 했다는 생각을 얼른 접었다. 아이고, 깨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