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한국예총 익산시회장
김영규

취미생활과 직업적인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색채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쉬지 않고 계속해왔다. 우리 주위를 감싸고 있는 자연과 환경, 삼라만상의 모든 것이 제 각각의 색채를 지니고 있으니 공기 속에 살면서도 그 중요성이나 관심, 오염도 등 지식은 미천한 것과 같이 온종일 색채 속에서 살면서도 그 감각이 무덤덤하기는 마찬가지이다.

1960년대 말 흑백 TV를 보다가 언제부터인가 컬러 TV로 화면이 바뀌면서 컬러에 대한 관심은 점점 높아져 오늘날에는 다양한 컬러에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오히려 단순한 컬러 즉, 무채색(검정, 백색, 회색)등의 흑백 색채에 관심이 더 가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50여 년 전 흑백 TV마저 없던 시절에는 흑백영화를 보는 것이 행운이며 유일한 오락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태어나기도 전 1942년 미국의 MGM이라는 회사가 만들어 지금까지 75년 동안 팬들을 사로잡은 추억의 명화 빈 르로이 감독의 흑백영화 ‘마음의 행로’(국내에서는 1954년 상영, 원작 Random Harvest)라는 영화를 잊을 수가 없다.

명문가의 아들인 찰스(로널드 콜먼)는 1차 세계대전 중 전투에 참가, 부상으로 기억상실증에 걸린다. 종전이 되던 날, 안개를 헤치고 수용소를 탈출한 찰스는 우연히 만나게 되는 댄서 출신 폴라(그리어가슨)와 결혼한 뒤 생활하면서 ‘스미티’란 애칭으로 불린다.

어느 날 자동차 사고로 과거의 기억을 되찾게 되는 찰스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사업가이면서 정치가로 대성하게 된다. 그러나 찰스는 최근 3년간의 행적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오직 과거를 기억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호주머니에 들어있는 열쇠뿐이었다.

남편의 행방을 찾아 헤매던 폴라는 유여곡절 끝에 찰스의 비서로 들어가 그를 보살피다 한 남자와 두 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가난한 시절 남편과의 추억을 되살리기 위하여 애쓴다. 여러 해가 지난 어느 날 파업사태 해결을 위하여 지역구에 간 찰스는 무엇인가에 끌린 듯 마을길을 따라 걷는다. 언제인가 왔던 것 같은 집 앞에 이른 찰스가 항상 지니고 다니던 열쇠로 현관문을 여는 순간 자신의 옛 애칭을 부르는 아내의 음성을 듣는다.

흑백 영화이지만 흑백의 단순함에서 특히나 흑(검정, Black) 색의 신비와 아련함에서 무한한 상상과 단순의 아름다움에 빠져들곤 했었다.

학문에 근거한 색채학에서 검정색(검은색, 黑色, Black)은 매사에 매우 부정적 의미로 표현하고 있다. 검은색은 모든 빛을 흡수하는 색으로서 블랙홀을 시작으로 공포, 암흑과 두려움, 권위(성직자, 지배자), 압박하고 엄숙하며 심원한 성질로 죽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서양문화권에서는 상징성과 연상작용으로 슬픔과 우울, 어둠의 대명사로 쓰이기도 한다.

근자에는 기업이나 정부, 단체 등이 부정적 의미를 작성하는 명단, 대상을 감시하거나 불이익을 줄 목적으로 작성하는 블랙리스트(Blacklist)가 있다.

옛날에 검은색은 결코 부정적이거나 사람들이 싫어하는 색이 아니었다. 중국의 진시왕은 진왕조가 수덕(水德)에 속한다 하여 검은색을 숭상했으며, 진나라 사람들은 검은색 천으로 머리를 감싸고 다녔는데 이를 검수(黑水)라 부르고,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후 스님의 엄숙, 장엄함의 상징으로 검은 승복들 착용하기로 했다. 중국의 한(漢)왕로가 황(黃)색을 숭상하면서 검은색은 가난과 비천한 지위를 상징하는 색으로 규정, 형벌에 처한 죄수의 옷, 가혹한 형벌의 방법의 하나인 묵(墨)형이 있는데 죄명을 새긴 뜨거운 인두로 죄인의 얼굴을 지진 다음 검은색으로 발라서 범죄기록을 남기는 동시에 정신적, 육체적으로 지울 수 없는 치욕을 안겨 주었다. 그때부터 검은색은 천하고 음흉한 색채가 되었던 것이다.

검은색을 뜻하는 블랙이라는 말이 요즈음은 듣기 좋은 말이 아닌 것 같아 씁쓸하다. 주로 듣기 싫은 기분 나쁜 말로 들리는데 이와는 반대로 화이트 리스트(Whitelist)도 있다. 긍정적 의미로 작성한 명단인데 대상에게 이익을 줄 목적으로 만든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

최근에는 블랙 아이스(Blackice)란 말도 있다. 기온이 갑자기 내려가 녹았던 눈이 얇은 빙판으로 변하는 현상을 말하는데 검은색 아스팔트 위에 투명하게 얼어붙으니 검은 얼음처럼 보인다 해서 붙여지지 않았나 싶다. 운전 중에 나타나는 블랙 아이스는 대형사고의 주범이다.

이래저래 검정(Black, 黑) 색은 조심하고 우선 당장 피하고 볼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