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한국예총 익산시회장

김영규

어제도 오늘도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은 어김없이 흘러가고 또한 모든 사람과 만물이 변해간다. 심지어 온 세상이 바뀌어가면서 가까이 존재했던 것들이 사라지고 없던 것들이 갑자기 생겨난다. 새로이 생겨난 것들도 언젠가는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사라져 가는 모든 것은 나름의 흔적을 남긴다. 흔적이 흔적인 이유는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와 같은 흔적을 통해서 과거는 현재로 흘러 들어온다. 과거의 영향으로 현재가 풍요로워지기도 하지만 황폐해지기도 한다. 새로운 미래도 과거를 통해서 형성된다. 미래에 대한 답은 과거에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젊은이는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산다지만 늙은이는 과거에 대한 향수와 아름다운 추억으로 생을 이어간다. 일주에 한 번 두어시간 정도 대화를 나누는 95세 된 어머님은 두 시간 내내 과거의 장점과 가치를 반복하여 강조하신다. 반대로 현재의 상황을 부정하시고, 격해짐으로써 나와는 설전이 벌어진다.

진정 과거에 대한 기억이 무조건 소중한 것은 결코 아니다. 자아의 정체성을 찾아주는 ‘착한기억’의 대표적인 경우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는 대비되는 작품 보르헤스의 “기억천재, 프네스”가 서로 비교되는 내용이 아닌가 싶다. ‘프네스’는 낙마사고 이후에 완벽에 가까운 기억력을 찾게 되지만 이와 같은 비상한 능력으로 오히려 현재의 시간을 과거 복원에 허비해 버리고 만다. 현재가 과거에 속박되는 모양새다. 온전한 기억을 위해서는 망각도 중요하다는 아이러니가 여기에서 발생한다.

차가운 겨울이 코앞이다. 경제적 여유가 있고 괜찮은 아파트에서 사는 경우는 겨울이 오면 오는구나 하겠지만 그리고 백화점이나 고급 펜션업체에서 호들갑을 떨어야 겨울이구나 생각하지만, 서민이나 달동네에서 동장군의 위세에 시달렸던 기억을 가진 서민들의 그것을 망각하고픈 소망이 앞선다. 이제 겨울과 다시 싸울 준비를 서둘러야 하기 때문이다.

좁은 골목길을 막으면서 아낙들은 김장을 하고 남정네들은 연탄을 날라야 한다. 시커멓고 사랑스러운 연탄은 구불구불 좁고 가파른 골목길을 힘겹게 올라간다. 반평생 노동으로 단련된 팔뚝과 단단한 장딴지를 바탕으로 두 장씩, 세 장씩 이리저리 날아다닌다, 이제 머지않아 마음껏 뜨거워지려고 제 안에 간직한 열정을 한 점도 남김없이 탕진하려고, 그리고 가벼워지고 하얘지려고 눈 내려 빙판이 되어 미끄러지는 언덕길에서 산산이 부서지려고 서둘러 달려간다.

이제 10여일 후 그러니까 12월 8~9일에 익산문화예술의 거리에서 ‘연탄 축제’를 열자고 문화재단 초년병인 나에게 제안을 한다. 얼떨결에 동의는 했지만 20여일이 지난 지금도 가슴이 설레인다.

불과 얼마전까지도 연탄을 이용, 보조난방을 해온 나에게는 그 흔적이 너무도 선명, 뚜렷하다. 연탄에 대한 글이나 시, 그림, 사진들은 아직도 이어져간다. 25년 전 익산에서 쓰여진 ‘연탄 한 장’이란 시를 읽고 감동인지, 동감인지를 느낀 영화평론가 신귀백 선생의 열변에 나는 넘어가고 말았다.

싸늘한 이 겨울에 우리는 혹시나 너무 많은 것을 기억하느라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딜레마에 빠진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기억해야 할 초심(初心)은 망각한 채 망각해야 할 상처만 기억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본다, 아마도 기억은 시간처럼 주관적이지만 시계처럼 공평하다 생각된다. 그러니 과거에 매몰되자는 것이 아니라 기억의 강도와 온도를 적절하게 조절함으로써 과거를 아주 잘 활용해 보자는 것이다. 망각할 것은 망각하고 가치 있는 것을 기억한다면 미래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앉은 소인의 역할을 과거가 해줄 수 있을 것이다.

어머님의 젊은 날은 검고 윤기 나는 머리카락에 탱탱하고 고운 피부는 젊음을 모두 감당하지 못해 윤기가 많이도 흘렀을 것이다. 아직도 연탄을 좋아하는 당신은 오랫동안 젊음과 환희, 그리고 즐거움과 한숨 등 모든 희망과 기대를 그렇게 다 태워버리셔서 머리카락은 하얘지고 피부는 금이 가고, 허연 비듬이 일어나고 얼룩얼룩 검버섯으로 변해가고 있다. 이젠 조작이나 최면이 아닌 화장이나 분장이 아닌 선택과 성찰이 작동하는 기억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