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 사람들 > 정당과 정치인은 정체성이 선명해야 한다

정당과 정치인은 정체성이 선명해야 한다

익산시민 유 성 무

4.13 총선을 전후로 정체성(正體性)이란 말이 자주 등장한다. 정체성은 쉽게 변하지 않음으로써 ‘내’가 ‘나’를 ‘나’로 인식할 수 있게 해줌은 물론이고, 타인이 ‘나’를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드는 특질로 이해된다. 저명한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은 이를 “자신 내부에서 일관된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과 다른 사람과의 어떤 본질적인 특성을 지속적으로 공유하는 것 모두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즉 정체성은 자아의 존재와 사회관계의 형성을 가능케 하는 그 무엇이란 의미다.

정체성은 옳고 그름, 선과 악의 개념이 아니다. 단지 나는 어떤 사람이고, 너는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것이다. 정체성은 또 고정불변의 개념도 아니다. 특정한 경험에 의해서 내적 일관성과 공유 가치가 바뀌기도 한다. 또한 주어진 상황에 따라서 기존의 일관됐던 태도와 다르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도 하는 인간의 속성을 보면, 정체성이란 것이 매우 복잡다난한 개념인 것만은 틀림없다.

정당은 특정 이념을 구현하는 정치를 하겠다는 사람들이 모인 결사체다. 따라서 구성원들로부터 분출되는 정체성이 선명해야 한다. 에릭 에릭슨의 정체성에 대한 정의처럼 정당의 강령이 일관되게 유지돼야 하며, 그 정치적 이념을 지지자들과 공유해야만 한다. 물론 사안에 따라서 정치적 양보와 타협도 필요하겠지만, 기본적으로 정당은 정체성이 명확해야 한다. 그 정체성을 바탕으로 국민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분투노력해야만 한다. 그것이 정당의 진정성이다. 진정성이 없는 정당은 개인적 목적을 위한 잡배들의 무리에 불과하다.

4.13 총선 동안 각 정당들은 나름대로 정체성을 규정하고 선거 캠페인을 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어떠한가? 선거를 통해 국민의 심판을 받은 새누리당은 논외로 하겠다. 서민과 약자를 위한 정치 구현을 내걸었지만 기실 새누리당 심판의 반사이익으로 원내 제1당이 된 더불어민주당은 벌써부터 구태로 돌아갔다. 선거기간 동안 보여준 공천 파동과 호남 참패를 반성하는 것은 고사하고, 책임 전가와 당권 싸움에 열을 올리고 있다.

대선 전에 당의 권력구조를 재편함으로써 전열을 가다듬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당 일각에서 호남 참패의 원인을 문재인에게 돌리면서 여전히 친노 프레임에 기대 공공연히 분란을 일으키고 있다. 또 김종인의 구조조정 및 한일 위안부 합의 관련 발언이나 최운열의 의료민영화 찬성 발언 등을 보면서 그들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현 정권과 더불어민주당을 심판하겠다면서 호남을 분열시켜가면서 제3당이 된 국민의당도 참신함과는 거리가 멀다. 겨우 제한적인 캐스팅보트를 얻은 현실에서 마치 자기들이 야권의 대표 세력인 마냥 거들먹거린다. 박지원은 현 정권과의 연정 가능성 등 모호한 태도를 보이면서, 어울리지도 않는 정체성을 들먹였다. 한편으로 호남의 발전을 거론하면서 말이다. 도대체 대의명분도 없고, 앞뒤도 맞지 않는다. 호남의 절반을 넘은 사람들이 겨우 권력의 귀퉁이를 붙잡으려고 그들에게 표를 던진 것이 아니다. 박지원의 말이 어떤 전략적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더라도 호남을 빌려서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굳히려는 작태로 밖에 볼 수 없다고 하겠다.

정치적 정체성은 본질적으로 치열한 투쟁을 전제로 할 수밖에 없다. 자신들과 정체성이 다른 정치세력과의 소아적인 감정 다툼이 아니라, 국민을 위한 논리적·감성적 싸움을 통한 정치 이념 구현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의회정치에서 무작정 힘으로만 의제를 해결할 수 없다. 따라서 상대에 대한 이해와 존중, 소통과 합의를 통해 교섭을 해야 한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정체성을 훼손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정체성은 옳고 그름의 가치판단적 성격이 아니라 일관성이라는 실천의 영역이다. 정체성 없는 경쟁은 치졸한 권력싸움이며, 정체성 없는 협력은 불종과 야합이다. 정치인과 정당은 스스로 존재하지 못한다. 자신들이 약속한 정체성 실천을 믿어주는 유권자들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으니, 정치인과 정당이 정체성을 잃는 순간 유권자들을 배신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정당과 정치인에게는 정체성을 바꿀 자유가 없다. 그저 일관된 실천 의무만 있을 뿐이다.

나는 정의당원이 아니지만, 이제 야 3당 중 정의당에게 정치적 정체성을 기대한다. 비록 소수정당이지만 정의당이라도 ‘함께 행복한 정의로운 복지국가 구현’이라는 선명한 정체성 실천을 통해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에게 정체성의 가치를 인식시켜주기 바란다. 더 이상 거짓 정체성으로 유권자를 우롱하면서 권력이나 탐하는 작태가 종식되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