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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충우돌 김장

윤복순 윤약국약사

고춧가루 이것으로 배추 20포기 김장할 수 있겠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다. 목소리도 좀 날카롭다. 동생이 힘이 많이 들었음을 알 수 있다. 여태까지 운 좋게 김장 한 번 안하고 맛있는 김치를 딸꼭 딸꼭 잘도 받아먹었다.

작년에 처음으로 김장을 했다. 두 식구 살면서 뭐 하러 김장을 하냐고 하지만, 일 년 반찬인데 안 할 수야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 살림을 못하다보니 햇김치도 담글 줄 모른다.

포도밭에 일하러 오는 아주머니가 담아 주기도 했는데 작년에는 외국여행 가는 사이에 그 집이 김장을 하는 바람에 내가 해야 했다. 고춧가루는 사돈댁에서 보내주고, 마늘은 간수할 줄 몰라 한꺼번에 갈아 냉동실에 둔다.

고춧가루와 마늘은 있으니 배추는 씻은 걸로 사면 되고, 젓국과 새우젓도 작년에 쓰고 남았고, 별것 아닐 것 같았다. 무엇보다 작년에 해보지 않았던가. 요리사인 동생에게 내가 김장을 해야 한다고 하니 나보다 더 걱정을 한다. 모든 것이 제 몫이 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작년에 양념을 얼마나 해야 할지 몰라 대충했더니 고춧가루 버물려 놓은 것이 열 덩이나 남았다. 봄에 봄동김치 여름에 고구마순김치도 담가먹으라고 했는데 내가 하면 맛이 없으니 재료만 버려 아예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것이 그대로 남아 있다.

올해는 작년에 못해줘서 미안하다고 아주머니가 해 준다고 했는데 그 놈의 고춧가루 열 덩이 때문에 내가 한다고 했다. 그것이 냉동실을 꽉 차지하고 있어 눈에 가시다.

임실 김치파티 때 양념이 모자라 씻어놓은 배추가 많이 남았다. 필요한 사람 가져가라고 해 나도 가져왔다. 양념을 녹여 새우젓과 마늘씨만 조금 더 넣고 버무리니 한 통이나 된다.

동네 아주머니들은 김장할 일이 죽기만큼이나 걱정스럽다고 한다. 아는 것이 병이라 그들은 준비하는 과정을 다 알기에 걱정이 앞서고, 나는 동생이 다 해주면 버무리기만 할 생각으로 천하태평이다.

동네사람들이 김장했다고 서너 쪽씩 갖다 주면 그것으로 버티다가 남들 다 끝나고 나면 할까 생각했다. 그런데 동생이 갑자기 친구가 씻은 배추를 준다고 하니 다섯 포기라도 얼른 김장을 하라고 한다. 냉동실에 고추 버물려 놓은 것 있으니 쉽게 대답했다.

다 저녁 때 동생이 모레 쉬는 날이니 한꺼번에 김장을 하자고 한다. 언제 배추를 주문하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작년에 씻어준 집에 전화를 하니 해 줄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얻은 배추를 이틀이나 놔둬도 될까.

작년에는 배추 씻어준 집에서 양념까지 다 해줬다. 배추 30포기에 청각은 몇Kg, 쪽파는 얼마치 또 뭣 들어가요?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보기 딱했는지 자진해서 배추에 맞춰 해주겠다고 했다. 고춧가루와 마늘이 있다고 하니 속박을 것은 다 해줬다.

번갯불에 콩 튀듯 이렇게 김장날을 잡았다. 다음날 출근하면서 고추양념덩이를 내놓고 나왔다. 고춧가루는 미리 불려놓아야 한다고 동생이 퇴근후에 들렀다. 고추덩어리, 남은 고춧가루 다 합해도 어림없단다. 고춧가루를 어디서 사지? 한 번도 사본 적이 없으니 앞이 캄캄했다.

롯데마트에 가면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고 한다. 20년 가까이 다녔지만 고춧가루 파는 곳은 보지 못했다. 나는 정말 왜 이렇게 살림을 못할까. 같은 재료라도 내가 요리를 하면 괴상한 작품이 나오니 남편은 내 손이 마이더스의 손이란다. 내 나이에 이런 소리를 듣고 산다.

동생이 한 살림을 가지고 왔다. 표고버섯 다시마 황태 다린물, 찹쌀풀, 청각 무 생강 배 등 갈은것, 쪽파 갓 미나리 등 잘게 썰은것. 시장을 몇 번이나 가고 이것들 다듬고 칼질하느라 하루종일 걸렸다고 한다. 냉동실에서 마늘씨도 내놓지 않았다고 한 소리 들었다. 목소리가 날카로울 만하다.

내가 아는 김장은 다된 양념을 씻어 놓은 배추에 바르는 것이다. 거실에서 이야기를 하며 하니 재미있고 할만 했다. 이렇게 많은 것을 준비하는지 몰랐다. 그래서 동네 아주머니들이 땅이 꺼지게 걱정을 했던가보다.

평일이라서 약국문에 ‘개인사정’이라 써 붙이고 집에 들어가 동생이랑 같이 버물렸다. 동생이 다 준비해 놓았으니 또 할만하다. 남편이 수육까지 만들어줘 제법 김장하는 날 분위기까지는 냈다.

나 혼자 담근 임실배추 김치를 가져와 보란다. 아빠맛도 엄마맛도 없다. 무엇보다 간이 맞지 않아 배추에 맨 고춧가루만 발라놓은 것 같다. 나는 요리하면서 간을 보지 않는다. 이것저것 적당히 넣고 무치거나 끊이면 그만이다. 이러다 보니 간이 맞지 않아 요리 못하는 사람이 된 것 같다.

동생이 어이가 없는지 입만 벌리고는 아무 소리가 없다. 1~2년 그런 것이 아니기에 체념을 했는지 언니는 어서 나가 약국이나 보라고 한다. 참 체면 안 선다.

연초에 털실로 목도리를 짰다. 며느리와 딸에게 줄 생각이었다. 다 짜고 나니 날씨가 풀려서 못주고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걸 동생 목에 둘러주었다. 동생은 요리는 잘하지만 뜨개질은 못한다. 색상도 예쁘고 촉감도 좋다고 입이 귀에 걸린다. 날 섰던 목소리도 많이 누그러졌다.

약국을 두세 시간이나 비워 뒤처리를 동생에게 부탁하고 나왔다. 동생이 아니었으면 엄두도 못 낼 김장을 이렇게 끝냈다. 동생은 시댁에서 김장을 해오고 올케는 친정에서 담근다. 그러니 동생네에 올케네에 묻어서 할 수가 없다. 양념덩이 없애려고 시작했다가 동생의 쉬는 날을 완전히 빼앗고 말았다.

청소까지 다 해주고 간 동생이 “언니 일 못하는데 오늘 고생 많았지.” 나를 위로해 준다. 딸네 아들네 김장을 해주는 것도 아니고 겨우 나 먹고사는 것으로 이러니 참, 나이는 어디로 먹었는지...

흔히들 시어머니 조항에서 며느리 난다고 한다. 며느리도 내 짝일 테니 김장때마다 이럴 것이다. 일찌감치 사먹는 김치에 입을 맞춰야 할까보다. 동생의 날선 목소리도 한 두 번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