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복순 윤약국약사

십여 년 만에 일본여행을 갔는데 돌아오는 날 눈이 내렸다. 일본은 지진, 태풍, 화산폭발 등 자연재해가 많다보니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 셋째도 안전이란다. 눈이 그리 많이 내리지 않은 것 같은데 고속도로가 통제되었다. 호텔에서 공항까지 두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라는데 여섯 시간이 걸렸다.

가이드도 18년 동안 오사카, 큐슈 가이드를 했지만 눈 때문에 고속도로가 폐쇄되기는 처음이라고 했다. 차들은 국도로 다 나왔고 눈은 쏟아지니 도로가 주차장이나 진배없다. 어디쯤에 화장실이 나오는지, 물이라도 살 만한 곳이 있는지 모른다고 했다.

그 날 관광지 하나를 구경하는 일정이었으나 비행기 출발시간도 못 맞추게 생겨 취소되었다. 웅성웅성하는 분위기에서 40년만의 대폭설이라는 정보에 차츰 말이 없어졌고 비행기만 탈 수 있기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빌었다. 자연재해로 일정을 못 지켜도 괜찮다고 사인을 했고 화장실이 급해도 다리를 꼬아가며 참고 견디었다.

방학 때라 나이 어린 학생들도 몇 있었는데 그 애들도 위기상황임을 감지했는지 잘 견디었다. 덕분에 공항에 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비행기 출발시간은 시간이 지날수록 지연되는 시간도 길어졌다. 그래도 집에는 갈 수 있으니 얼굴이 환하다. 면세점을 기웃거려도 타고 갈 비행기는 도착하지 않는다.

총무가 동전을 모아 도쿄바나나를 사겠다며 동전 재촉을 했다. 그 때 탑승이 시작되었다. 인천에 도착하니 예정보다 두 시간 늦었다. 인천에서 나눠먹겠다던 그 빵을 내 품에 안겨주었다.

인천공항에서 애들에게 무사히 도착했다고 전화를 했다. 전라도지방에 눈이 많이 내려 공항리무진을 타는 것은 위험할 뿐 만 아니라 봉동에서 집에 가는 택시를 잡지 못할 것이라며 아들이 열차를 예매해 주었다.

익산역에 내리니 대관령에나 있을 법한 많은 눈이 쌓여있고 산발적으로 또 눈이 내린다. 자정이 되어가는 시간이다. 택시정류장에는 주인공은 없고 사람들만 발을 동동 구른다. 동화 속 같은 설국이지만 사람들 얼굴엔 불안감이 묻어있다.

택시정류장에서 십 여분을 기다렸다. 택시는 오지 않고 사람들만 더 늘었다. 꾀를 내어 길을 건너 조금 위쪽으로 올라가 사람들이 없는 쪽에서 기다려 보기로 했다. 기온은 영하 16도라고 뜬다. 추워서 천천히 걸었다.

인도는 일요일이라서 거의 치워지지 않았고 차도도 한 가운데만 겨우 찻길이 나있는 정도다. 차가 다니지 않아 찻길로 걸었다. 눈이 쌓여 캐리어가 끌어지지 않았다. 바퀴가 바퀴 구실을 못하니 가방이 무거워 걷기가 힘들었다. 눈 때문에 빙판 때문에 빈 몸으로 걷는 것도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몇 발작도 못 걷고 멈추었다. 택시 하나가 왔다. 반가워 손을 번쩍 들었지만 그냥 지나갔다. 몇 걸음 걷다 쉬기를 반복했다. 택시 하나가 또 왔다. 손을 들었지만 못 본채 쌩 지나갔다. 그렇게 택시 네 대를 보냈다. 집까지 걸어가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이런 상태로는 두 시간도 더 걸릴 텐데.

지난 일요일 성지순례길을 걸을 때다. 예상하지 못한 비가 내렸다. 다리 밑에서 비를 피해보았다. 비가 그치지 않았다. 무슨 배짱이었을까 갈 때까지 가자는 오기가 생겼다. 세 시간 정도 비를 맞으며 걸었다. 점퍼는 물론 속옷까지 약간 젖었다.

그 날의 구간을 채우고 싶었고 체력도 시험해 보고 싶었다. 한옥마을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전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내려 전주 익산 직행을 탔다. 익산 터미널에서 집에 오는 시내버스를 탔다. 버스에서 내리니 입이 덜덜 떨리면서 막 동당걸음이 쳐졌다. 우리 동네라서 체면을 차리려 해도 이빨 부딪치는 소리가 옆에 까지 다 들릴 정도고 어깨가 오그라들고 자꾸 고꾸라질 것 같았다.

걸을 때는 추운지 몰랐다. 버스는 비가오니 김서림방지를 위해 난방을 약하게 한 것 같았다. 버스는 바로바로 연결되어 춥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 저체온증이 온 것이다.

그날 교훈으로 힘들어도 추위 때문에 걸어야 했다. 몇 미터나 걸었을까. 승용차 한 대가 앞에 섰다. 아저씨가 내리더니 영등동 가는 데 타겠느냐고 물었다. 눈은 내리고 도로는 빙판인 오밤중에 모르는 사람을 태워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 그날 밤에 일어났다.

일단 태워줬으면 집에 까지 모셔다 드려야 하는데 도로가 이래서 자기 집까지라도 가고, 거기서 택시 타시라고 해야 하는데 택시는 다니지 않으니 그냥 가야할까 태워드려야 할까 많이 망설였다고 했다.

나는 좋은 양반 만나 운수대통 했다고 고마움을 표시했다. 며칠 전 부송동에서 친구들과 소주 한 잔 하고 차를 놓고 택시를 잡으려는데 눈은 오고 길은 미끄러운데 택시가 다니지 않아 집까지 걸어오며 고생했던 생각이 나서 차를 세웠단다.

나는 어느 아파트 사는데 아저씨는 어디 사느냐고 물으니 우리 아파트에 사는 것이다. 걱정 뚝 이고 안심 빵이다. 7동에 산단다. 나도 7동에 살다가 앞 동으로 나왔다며 처음부터 그곳에 살았냐고 물으니 이사 온지 얼마 안 된단다. 내리면서 슬쩍 호 수를 물었다. 천 몇 호라고 했는데 중간을 못 들었다.

다음날 호 수를 알아내려 관리실에 가려는데 여직원이 약을 사러 왔다. 7동 5, 6라인에 최근에 이사 온 집을 찾으니 금방 알아 낼 수 있었다. 이것저것 궁리하다 도쿄바나나를 갖다 드렸다.

몇 십 년 만의 폭설이고 한파다. 몸도 마음도 얼어붙는다. 아저씨는 이 엄동설한에 핀 매화일까. 아저씨의 온정에서 봄을 보고 희망을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