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시민 유 성 무

온통 어수선하기만 한 나라 꼬락서니에 마음이 참담하기 그지없다. 가계와 국가 부채는 천정부지로 치솟고 경제는 엉망인데, 남북관계는 극한대치로 치닫는다. 1997년 외환 위기나 북한의 1차 핵실험 때 느꼈던 공포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두려움이 엄습한다. 국민의 고통을 해결해야 할 정치권은 허구한 날 이합집산하면서 당리당략에만 몰두한다. 굳이 국회의장과 여권이 나서서 국가비상사태라고 하지 않아도, 상식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지금이야말로 1919년 대한민국 건국 이후 최대의 위기상황이라고 판단할 것이다.

위기를 전혀 관리하지 못하는 정권과 정치권의 무능, 무소신, 무책임에 환멸을 느끼던 차에 한줄기 희망의 빛줄기를 보게 됐다. 테러방지법 저지를 위한 필리버스터에 나선 몇 명의 국회의원들을 통해서 말이다. 특히 더불어민주당 은수미 의원의 10시간 넘는 절규가 지금도 생생하다. 은수미는 고문과 수감으로 온몸이 망가져서 생사를 넘나드는 고초를 겪고 지금도 후유증에 시달린다고 한다. 그런 사람이 긴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논리정연하게 말을 이어가는 것이 경이로웠다.

은수미의 마지막 발언은 감동적이었다. “사람을, 약자를 위한 정치에는 여야, 진보와 보수가 없다. 우리는 화해와 사랑, 응원과 격려를 통해 같이 살아가야 한다. 저의 주인이신 국민을 포기할 수 없다. 국민을 믿는다.” 눈물을 참아가며 마지막 10여분 동안 기나긴 발언을 정리했던 은수미의 말에서 국가비상사태를 불러온 원인이 드러났다. 국민의 힘으로 이 사태를 극복하자는 진심이 절절히 묻어나왔다.

누구나 은수미의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고는 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은수미는 민주국가에서 정치의 목적이 무엇인지, 정치인이라면 어떤 자세로 국정에 임해야 하는지에 대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절대가치를 논했다. 바로 ‘사람’과 ‘국민’이다. 천부의 권리를 향유하면서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 중심 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정치의 본령이다. 정치가 그런 세상을 만들도록 강제하는 것이 ‘국민’의 존재가치다.

은수미는 국민이 자신의 존재가치를 망각하는 순간 사람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고 국민은 통치의 대상으로 전락됨을 온몸으로 부르짖었다. 어떤 경우에도 결국은 불의를 이겨 나온 국민의 저력을 믿기에, 포기하지 말고 국민이 주인 되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끝까지 나가자는 호소에 가슴이 벅차왔다. DJ와 노무현 이후 오랜만에 정치인을 통해서 진한 감동과 희망을 느꼈던 순간이었다.

필리버스터를 통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과 국민들에게 뜨겁게 호소한 국회의원들이 어디 은수미 한 사람뿐이겠는가? 미처 준비할 시간도 없이 맨 처음 나서 5시간 넘게 테러방지법안의 문제를 조목조목 지적한 더불어민주당 김광진, 9시간 넘게 분투한 정의당 박원석, 무려 11시간 동안 열변을 토한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등 필리버스터에 참여한 많은 의원들이 아직 야권의 양심이 살아있음을 보여줬다.

이들의 헌신에 대해 고마움과 함께 아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이토록 사람과 국민에 대해 굳건한 소신을 지닌 정치인들이 모여 있는 야권의 사분오열 때문이다. 그것도 사람과 국민의 명운을 결정할 총선과 대선을 바로 앞에 두고 말이다. 온힘을 모아서 여권과 싸워도 승리하기 힘든 형국에서 분열하고 서로 싸운다면,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아무리 깨어있는 소수의 정치인들이 애를 써도 적전분열과 각개전투로는 총선승리와 정권교체는 요원하다.

그래서 야권을 지지했던 ‘사람’과 ‘국민’은 절망했다. 다행히 은수미를 비롯한 필리버스터 전사들을 통해서 희망의 불씨를 발견했다. 이들의 결기로 힘겹게 살린 불씨를 이제는 내부단결과 진보진영 연대를 통해 끝까지 살려야만 한다. 한 번 더 당선되겠다는 소아적 이기주의와 나와 다르면 안 된다는 배타성을 태워버리고 참된 진보의 횃불 아래 모두가 모여야 한다. 그것이 그들의 주인인 국민의 명령이고, 지금 야권이 국민에게 사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정말 국가비상사태다. 분단 현실에서 주변 강대국들의 입김에 휘둘리고, 경제는 부익부 빈익빈의 악순환 늪에서 침체 일로에 빠져 있다. 일자리는 불안하고 가계는 빚더미에 신음한다. 그럼에도 여권은 독주하고 야권은 내분으로 정신없다. 효율의 미명하에 사람은 없어졌고, 사람 살만한 세상을 만들어야 할 국민은 지역과 이념으로 쪼개졌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테러보다 무서운 것이 절망이다. 절망은 사람을 극단으로 내몬다. 절망한 사람은 테러에 무감각해진다.

은수미가 눈물로 호소한 ‘사람과 국민이 절망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부디 야권이 필리버스터에서 보여준 진심과 결기를 협력으로 증명하기 바란다. 분열로 독주를 방조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에 대한 테러임을 자각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