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복순 윤약국약사

중남미여행을 예약하고 나니 다른 때와는 달리 ‘잘 다녀와야 할 텐데’ 하는 염려가 살짝 생겼다. 여행기간이 길고 비행기를 경비행기 포함 열다섯 번이나 탄다는 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행 날짜가 임박해서는 소두증 얘기가 나오더니 본격적으로 지카바이러스 뉴스가 매일 보도되었다. 염려가 걱정으로 바뀌었고 애들까지 취소하라고 야단이었다.

내 나이에 임신할 일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큰소리 쳤지만 나이가 나이이니 만약에 걸린다면 심한 독감을 앓게 될 터이니 마냥 걱정이 되지 않는 것만도 아니었다. 다시 마음을 돌려 ‘내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고 뉴스까지 타겠냐’ 하며 마음 편하게 출발했다.

20여 일 동안 점만 찍는 파라과이까지 일곱 나라를 다녀야 하니 1/3은 비행기 타는 시간과 공항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차지했다. 길게는 열두 시간 짧게는 한 두어 시간 타는데 입국 출국 심사에 기다리는 시간 때문에 공항 가는 일이 신경 쓰이고 공항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다.

멕시코에서 칠레 산티아고를 경유하여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가는 날이었다. 멕시코에서는 교황님이 오시는 날이라고 공항 가는 길이 통제될 수 있다고 해서 비행기 출발 예정시간보다 4시간이나 일찍 공항에 도착했다. 여러 나라 사람들 구경을 하다 티켓팅을 했다.

남편과 내 좌석이 서울서 부산만큼 떨어져있다. 멕시코시티에서 산티아고까지 여섯 일곱 시간 간다는데, 남편이 비행기 안에서 맥주 마시는 것을 좋아해 내가 마시는 것처럼 얻어서 준다고 했는데, 무엇보다 덩치 큰 외국 남자가 내 옆에 앉는 것도 싫은데, 인솔자는 일행 중에 좌석을 바꿀 수 있으면 일단 타서 바꿔보자고 했다.

다행히 혼자 온 아주머니가 나와 자리를 바꾸겠다고 나섰다. 남편 옆에 앉아 갈 수 있게 되었다. 일행 중 애교쟁이 아주머니가 “경하 드리옵니다” 라며 축하해줘서 한바탕 웃었다. 눈이 나쁜 나는 샘플을 보고 쓰는 입국심사서도 쉽게 쓰지 못한다.

바꾼 좌석은 비지니스석 바로 뒷자리로 앞이 넓어 다리 뻗기도 좋을 뿐만 아니라 밖을 내다보며 갈 수 있어 여러모로 기분 좋은 자리였다. 그 기분을 채 만끽하기도 전에 승무원이 오더니 영어 할 줄 아냐고 물었다. 못한다고 했다. 스페인어 할 줄 아냐고 또 물었다. ‘아니 이자식이 영어도 못한다는데 무슨 스페인어까지. 염장 지르나’ 빈정이 상해서 “Only KOREAN” 하며 톡 쏘아주었다.

지금까지 비행기 타면서 영어 할 줄 아냐 스페인어 할 줄 아냐 하고 묻기는 처음이다. 뭐라 뭐라 설명을 하더니 좌석표를 보여 달란다. 제기랄! 내 번호가 아니지 않은가. 짧은 영어로 남편과 같이 앉고 싶어 좌석을 바꿨다고 했다.

또 뭐라고 한참을 설명을 한다. 천천히 들어보니 이곳은 비상구라서 만약을 대비해 영어나 스페인어가 능통한 자가 앉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또 누구와 자리를 바꿔 앉아야 한단 말인가.

몇 년을 배운 영어인데 이렇게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해 수모를 당해야 하니 화가 치밀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발권을 할 때 이 자리는 비상구가 있는 자리이니 영어나 스페인어 할 줄 아느냐고 물어보고 표를 주었어야 할 것 아니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그놈의 영어가 되어야 말을 하지. 부아가 나서 막무가내며 끝까지 버틸까도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내가 탄 비행기가 멕시코를 떠나 칠레까지 무사히 도착하는 것이다. 비상구를 열어야 하는 일이 생기지 않아야 하겠지만 만에 하나 그런 불상사가 생길시 내가 그 자리에 앉는 것은 여러 사람에게 불행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알았다고 하고 인솔자를 찾았다. 사정을 얘기해 인솔자 옆 사람이 칠레 사람으로 스페인어가 되어 인솔자와 같이 비상구 자리로 가고 나와 남편은 불편한 가운데 자리에 앉아 가게 되었다. 이런 때 남편이라도 영어가 된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바보같이 영어도 못하고.

비상구 쪽 좌석에는 영어는 기본이고 그 나라의 언어가 되는 사람이 타는 것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이렇게 영어 때문에 망신당하고 나면 영어 좀 배워야지 하는 마음이 꼭 생긴다. 그런데 말이라는 것이 매일 해야지 하지 않으면 금새 잃어버리고 만다. 일상에서 영어 쓸 일이 몇 번이나 있다고. 이러다 흐지부지 되고 만다.

속상했던 마음도 언제 사라졌는지 잠이 들었고 막상 산티아고 공항에서 내려야 할 때는 잠이 덜 깨어 조금 더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좌석에 앉았더라면 조금은 편하게 왔을 텐데 그놈의 영어를 못하는 바람에 옹색하게 자고 왔더니 온몸이 찌뿌드드하다. 더러워서 영어 좀 배워야 할까보다.

여행은 초반이다. 또 어떤 속상함이나 건강에 이상이 있을지 모른다. 여행 떠나기 전에 잠시 일었던 염려나 걱정이 이것 때문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