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복순 윤약국약사

일주일 만에 그들이 갔다. 3월 초 왔을 때만 해도 이렇게 계속 이어질 줄은 몰랐다. 그는 사관학교를 나와 고급장교로 퇴직을 하고 관련 부서에서 일을 하다 이젠 완전히 자유인이 되었다.

멀리 인천에서 온다. 친가가 같은 전북 권에 있지만 밭에서 한 시간 이상 걸린다. 어머니가 살아 계시니 그곳에도 들를 겸 밭에 와서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처음엔 가지치기를 하고 그것들을 바숴 밭에 깔았다. 그동안 어머니 집에서 자고 다녔다. 2박 3일 일을 하러 먼 길을 오는 것은 기름 값도 나오지 않는 비효율이라는 핑계로 나는 반대했다.

60세에 퇴직하면 너도 나도 할 일이 없어 큰일이다. 몸과 마음은 너무 젊어 집에만 있는 것도 고역이다. 노는 것도 하루 이틀이고, 여행도 바쁜 중에 짬을 내 다닐 때 매력이 있다. 현역에 있을 때 퇴직하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싶지, 막상 은퇴를 하면 새 일을 시작한다는 게 엄두가 나지 않아 그냥저냥 세월을 보낸다.

집에서 놀아도 돈을 써야 되니 바쁜 농사일을 도우면서 그 돈을 쓰자는 마음으로 일을 하러 온다고 했다. 그는 여동생의 시숙이고 남편의 군대 후배다. 처음 하는 일에 며칠은 재미있어했다. 그러나 농사일이 어디 그리 만만하던가. 날은 더워지고 땀을 어찌 흘리는지 옆에서 보는 내가 더 민망하다.

두 번째 올 때부터 친구까지 데리고 왔다. 친구도 대학 동기로 경력이 그와 같다. 포도밭의 자투리땅 일부에 상치와 쑥갓을 심고 주차장에 부직포를 깔아 풀은 물론 흙의 흘러내림도 막아줬다. 농장 입구가 산뜻해졌다. 그때 까지만 해도 본격적인 농사철이 아니어서 텃밭이나 가꾸는 정도였다.

지금은 포도 줄기를 걸고 곁순과 넝쿨손을 딴다. 아주머니들은 손이 닿지 않아 의자를 놓고 올라 다니며 따는데 그들은 키가 커 속도가 붙는다. 밭이 넓어 한 바퀴 돌고 나면 처음 했던 곳은 어느새 귀신이 산발한 모습이 되고 만다. 그들이 그 일을 맡았다. 농번기에 천군만마다.

문제는 숙소다. 남편은 아침 일찍 일하는 아주머니들을 태우고 가고 일이 끝나면 또 태우고 온다. 어느 날은 남편이 오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과 찜질방에서 잔다는 것이다. 우리 집으로 데리고 오라고 할 수도 없고 친가에 가서 자는 것도 무리다. 그의 어머니가 구십을 훨씬 넘겨 아들 친구까지 밥을 해 줄 수는 없다. 걱정하는 내게 수십 년 군대라는 야전생활을 했는데 뭔들 못하겠느냐고 걱정하지 말란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기로 맘먹은 것을 다 하지 못하면 집에 가는 것도 미루며 꼭 끝을 내준다. 지금도 군인정신이 살아있다. 아니 주인의식까지 있다. 아주머니들은 시간이 되면 아주 조금 남았어도 바로 퇴근한다.

자기들이 아직은 젊은지 몸과 정신을 테스트해 보는 걸까. 작년에는 제주도를 비롯해 전국을 자전거로 누볐다고 하더니 올해 목표는 농사일일까? 내 마음 편하자고 지금까지 안 해 본 것에 도전하는 열정의 청년(?)들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남편이 고생하는 것을 보고, 자기들이 직접 일을 해보고는 나이 먹으면서 하기에는 밭이 너무 넓다고 줄였으면 좋겠다고 한다. 일하는 아주머니들도 나이가 들어 힘이 부치기는 매한가지다.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나도 농장을 줄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밭을 놀릴 수는 없고, 세를 내주려 해도 맡아할 사람이 없다. 반절만 떼어 팔 수도 없고, 아무 일도 안 하고 남편이 집에만 있는 것은 많은 농사일 하는 것보다 더 못할 노릇이다. 묘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들이 군대의 작전 회의하듯 내놓은 의견이 태양광전기다. 밭 주변에 주택이 없어 민원이 발생할 일도 없을 뿐 아니라 햇빛을 가리는 방해물도 없다. 미세먼지 때문에 화력발전소도 없애고 원자력발전소도 줄이는 추세이니 안성맞춤이라는 것이다.

올 포도농사가 끝나면 우선 절반만 시작해보란다. 솔깃하다. 벌써부터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온다. 새로운 것의 시작은 흥분되고 기대와 걱정이 있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한다. 다시금 젊음으로 돌아가게 한다.

포도가지를 V자 형으로 3단까지 올려놓고 넝쿨손과 곁순을 따주면 사병들이 사열을 하고 있는 듯하다. 나는 사단장이라도 된 듯 포도나무들의 경례를 받으며 밭으로 들어간다. 절도 있는 젊은이들의 매스게임 같은 포도밭이다. 하루가 다르게 밭은 녹색물결이고 나무들은 청년이 되어간다.

이 나무들은 잘라내고 태양광전기를 할 생각을 하면 아쉬움이 남는다. 들자니 무겁고 놓자니 깨진다는 속담이 있다. 내 마음이 이렇다. 우선순위를 정하자. 첫째도 둘째도 일을 줄여 남편을 일 구덕에서 구출해 내야 한다.

남편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고 포도들이 자라는 것을 보면 힐링된다고 하지만 지쳐 있을 때가 많다. 남편도 나도 지치지 않을 만큼만 농사를 짓고 나머지는 태양광 전기로 하면 될 것 같다. 그들이 내 숙제를 해결해 주었다.

올라간 지 며칠이나 됐다고 그들이 내일 내려온단다. 벌써 일 맛을 알았나? 포도나무들이 부르나? 어느새 일곱 번째 온다. 태양광전기에 대한 회사별 장단점과 설치비용 등을 알아와 브리핑할지도 모르겠다. 일 욕심 많은 남편을 설득하는 것도 그들 몫이다.

남의 일도 내 일같이 하는 그들의 열렬한 애정이 걱정을 몰아내고 긍정의 힘을 준다. 감사하고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