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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부와 기증의 생활화

(사)한국예총 익산시회장

김영규

필자보다 열 살 연상인 하정웅(1939년생) 선생은 일본에서 태어난 지 50년후, 부모의 조국인 한국의 광주에 왔다가 지방미술관의 열악하고 한심한 현실을 보게 된다.

“나의 미술품 수집(Collection)이 이래서 존재했구나” 하는 탄식과 함께 1993년 7월 12일 하정웅은 이우환 등 재일작가 작품 212점을 광주시립미술관에 아무 조건 없이 기증했다. 지금까지 그의 기증 목록은 영친왕, 이방자 여사의 자료 798좀(국립고궁박물관)을 비롯하여 광주 시립미술관에 2,222점과 부산시립미술관 447점 등 수 천억 원대의 작품이다.

그뿐 아니라 그는 광주지역의 시각장애인 복지사업에 관심과 사랑으로 맹인(盲人)들의 아버지란 별명까지 얻게 된다. 이 위대한 컬렉터(Collector)는 말했다.

“처음 작품을 기증할 때는 딸을 시집보내는 아버지처럼 허전하기 그지없었어요. 무엇으로도 채워질 수 없는 공허감을 느꼈어요. 하지만 순수한 예술적 정열을 지닌 다음 세대에게 내 인생의 표창(表象)같은 컬렉션이 메시지를 줄 수 있다면 그게 진정한 가치가 아닐까요? 제가 살아왔던 눈물과 절규의 삶 말이에요.”

1925년 열여섯의 하헌식이 아내와 같이 현해탄을 건널 때 그의 나라는 없어졌고 고향은 피폐하여 먹고살자는 일념으로 남편은 마부로 아내는 자갈을 소쿠리에 담아 나르는 노동자로 14년, 중일전쟁이 태평양 전쟁으로 번지는 순간 하정웅이 태어났으니 그의 앞날은 암흑과 같았으며 히가시오사카에서 아키타까지 그의 가족은 입에 풀칠하기 위하여 헤매야만 했다.

가난한 소년에게는 소망이 있었으니 그것은 미술에 대한 열망이었다. 화폭의 세계에는 차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를 눈여겨 본 중학교 스승이 진학을 권유했으나, 동생이 넷인 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하정웅보다 더욱 실망한 이는 그의 어머니였다. 그 어머니는 초등학교도 못 나온 무식으로 숱한 고생을 하니 모진 결심과 함께 돈벌이를 시작하게 된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쌀 암거래를 시작하고, 형무소에 수감되는 고생을 하면서도 굴하지 않고 억센 모성(母性)으로 다섯아이를 모두 고교까지 진학시키는 기적을 이루었다. 그의 어머니가 하정웅의 화구를 강물에 던져버렸을 때 그는 화가가 될 꿈을 가슴에 묻어야 했고, 일자리가 보장된다는 공고(工高)를 가게 된다.

하정웅 일본명은 가와모토였다. 아키타 공고 기계과를 전교 3등으로 졸업한 그에게 일자리는 어려웠다. 성적은 월등했으나 ‘조선인’이라는 말만 나오면 면접관의 표정이 변했으니 실패만 쌓여갔다. 좌절이 반복되는 청춘이 그의 가슴 속 깊이 묻혀있던 시절, 미술에 대한 열정이 없었다면 그는 미쳤거나 야쿠자가 되었을 것이다.

1959년 겨울밤, 그는 짐을 정리하고 우에노행 열차를 탔다. 18년간 머물렀던 아키타의 차창 밖엔 북풍이 포효하고 밝은 태양이 쏟아지는 것만 같은 착각 속에.

몇 년 전 고흐전(展)이 열린 일본 국립박물관이 있는 곳 야간열차가 아닌 고흐의 작품 ‘밤의 카페테라스’가 있는 곳에 ‘사랑하는 고흐, 나도 그처럼 될 수만 있다면’ 하는 생각으로 열차에서 내렸다.

다음날부터 하정웅은 메구로의 전기회사에서 낮엔 일하고 밤엔 디자인 학교에서 공부하는 생활을 시작하고, 월급 6,000엔 중 반을 학비로 내고 나머지로 생활하는 궁핍 속에 그의 눈은 영양부족으로 망가지고 실명에 가까운 상태로 실직하고, 태풍으로 집은 침수되고 죽음만 기다리는 처량한 신세가 됐다. 그때에 조총련 구조대가 그를 구한 뒤 북한에 가면 대학도 병원도 집도 공짜라고 말한다. 그것은 악마의 속삼임이었으나 시력이 회복된 뒤 조총련 지부를 찾았을 때 너는 아직 젊으니 귀국을 늦추고 일을 도와주라는 소리에 하정웅의 인생은 전환기가 시작된다.

그때부터 하정웅은 조총련의 일꾼이 되어 노력했고 김일성 훈장을 두 번이나 받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운명처럼 가전(家電)양판점을 인수하게 된다. 1년 뒤 도쿄올림픽(1964)이 열리자 가전제품이 불티나게 팔리면서 그는 돈방석에 앉게 된다. 그리고 잠자던 미술의 열정이 꿈틀거리게 되고, 되살아나게 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집 현관 앞에 ‘하공방(河工房)’이라는 문패를 걸어놓고 한·중·일 작가의 작품 수만 점을 사들였다.

기부와 기증 문화가 빈약한 우리의 현실이 안타깝다. 다른 사람의 기부조차 엉뚱한 눈으로 보려 한다.

선진사회 즉 선진국이라 함은 기부와 기증이 생활화되어 있으며, 예술과 예술품을 아끼고 예술인을 사랑하는 사회를 말한다. 하정웅! 그가 벼락부자가 된 뒤 조총련을 그만두려 하자 그들은 그를 왕따 시키고 간첩 취급까지 했으며 그는 김일성 훈장을 쓰레기통에 내던졌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