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복순 윤약국약사

얼마나 피곤했는지 비행기가 이륙도 안 했는데 손녀들은 잠이 들었다. 4박 5일 동안 잘 따라다니고, 잘 먹고, 아무 탈 없이 비행기까지 타니 긴장도 풀렸는가 보다. 첫날 인천 공항에서 비행기 뜰 때 무섭다고 손을 잡아달라고 할 때 비하면 많이 의젓해졌다.

딸이 애들이 다섯이나 되다 보니 민정 민희는 외국여행도 처음이고 비행기도 처음이다. 지난 추석 때 포도농사 끝나면 할머니 할아버지가 외국여행 데리고 간다고 했을 때 둘이 손바닥을 마주치며 좋아하던 모습도 생생하다.

네 친구들에게 자랑하라고 했더니 “자랑하면 뭐해요.” 하며 시큰둥했다. 다른 애들은 벌써 다 다녀왔다는 것이다. 엄마 아빠랑 가는 것이 아니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데리고 간다고 자랑하라고 하니 “다 할아버지 할머니랑 갔다 왔어요.” 당연하다는 듯 말한다. 그러면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랑 간다고 해. “애들이 외자는 안 붙였는데.”

딸네랑 여행할 때면 번잡해도 남편과 나는 딸네 차에 합승한다. 어느 여행에서든 돌아올 때는 차안에서 퀴즈를 낸다. 복습을 해 여행지에 대한 기억도 살리고 보충설명도 위함이다. 답이 맞으면 만 원씩 주는 재미도 좋고, 아무것도 모르는 다섯 살짜리 쌍둥이들이 언니 오빠를 따라 ‘저요. 저요’ 하는 모습도 귀엽다.

지난 여름휴가 때다. 모두 사이좋게 만원씩 받았다. 갑자기 남편이 영어 문제를 냈다. 6학년인 해성에게 유리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영어 문제라며 5만원을 줬다. 민정이가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저는 배우도 않은 문제를 냈을 뿐 아니라 왜 5만원을 주냐는 것이다. 정말 서럽게 울었다. 오빠는 통장에 돈도 많고 저는 오빠 반절 밖에 안 된단다. 너는 아직 나이가 어리니, 오빠 나이가 되면 너도 그 만큼 될 수 있다고 해도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는 오빠를 더 예뻐한다는 것이다. 저희 금산 할머니집에 가도 할아버지 할머니가 오빠를 더 예뻐하는데 외갓집에 와도 오빠만 더 예뻐해 속이 상했다고 한다. 항상 똑같이 한다고 했는데 애들은 그렇게 느꼈나 보다. 내 생각에 전혀 손자만 편애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민정이가 하나하나 예를 든다. 오빠는 2학년 때 외국을 데리고 갔는데 저는 3학년인데 아직까지 못 갔다. 외국돈도 오빠만 있다. 휴대폰도 오빠만 얻어줬다. 등등.

가까운 곳에 짧은 일정일 때 데리고 가려고 했는데 맞지 않아 못 데리고 갔다. 올 가을에 데리고 갈 거야. 외국 돈은 오빠가 중국 갔을 때 일행들이 예쁘다고 준 거다. 휴대폰은 외삼촌이 할머니 여행 다닐 때 사진 찍으라고 준 건데 할머니 사진 찍는 것 싫어하니까 줬어. 또 사람들이 휴대폰 바꾸면서 헌 것 나오면 너도 얻어줄게. “왜 사람들은 빨리빨리 휴대폰을 안 바꾼대요?” 해서 다들 웃었다.

어린 것이 이렇게 차별받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몰랐다. 미안하다. 민희도 언니 말에 동감이라며 오빠를 더 예뻐한다고 느꼈단다. 서둘러 여행지를 정하고 날짜를 잡았다. 베트남 다낭이다.

내가 손녀들과 외국 여행 하는 줄 아는 502동 아주머니가 휴대폰 바꾸었다며 헌 휴대폰을 가지고 왔다. 민정이가 얼마나 좋아할지 안 봐도 비디오다. 민희가 좀 서운해 하겠지만 다음에는 제 차례라는 것을 알기에 투정부리지 않고 기다릴 것이다.

민정과 민희는 한 살 터울이다. 정확히 19개월 차이다. 어릴 때는 차이가 많이 난다. 그런데 민희는 승부욕이 강해 언니한테 지려하지 않는다. 언니가 하는 거면 저도 다 해야 한다. 민정이만 잘 키워놓으면 민희는 저절로 될 것 같다.

베트남에서도 저희 둘이 잤다. 나는 걱정이 되어 민정이는 나랑 자고 민희는 할아버지랑 자자고 했다. 조금 무섭겠지만 저희 둘이 자겠단다. 샤워도 하루는 민정이가 먼저하고 다음 날은 민희가 먼저 하는 걸로 정했단다. 배낭도 하루씩 교대로 메겠단다. 아침에도 몇 시에 일어나고 몇 시에 밥 먹으러 간다고 하면 제 시간에 딱딱 맞췄다.

민희가 출발할 때부터 감기기가 있고 기침을 콜록콜록 했다. 열은 없었다. 베트남에서 하루 종일 잘 지냈는데 저녁식사 후 호이안에서 야간투어 때다. 자유시간이어서 구 시가지를 구경하는데 기운이 없다며 쉬고 싶다고 한다. 나와 민희만 먼저 나와 만남 장소에서 앉아 쉬었다.

민희가 배낭을 메고 있다. 배낭 안엔 우산 두 개와 물도 있어 제법 무겁다. 민희야, 몸이 아프니까 언니한테 배낭 메라고 하지 그랬어? “안돼요. 오늘은 내가 메는 날이에요.” 언니한테 부탁하면 안 돼? 그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언니한테 말하지 말란다. 어리지만 책임감과 그 정신에 ‘아이고 예뻐’ 하며 안아줬다.

새벽에 호텔수영장에 갈 거냐고 물으니 가보고 싶다고 한다. 이른 시간이라 아무도 없다. 아니 비가 와서 없다. 베트남은 우기고 수영장은 옥외다. 약간 쌀랑했다. 애들이 방과 후 학습시간에 배웠다며 자유영 부터 접영까지 다 해보겠단다. 나는 자유영과 평영만 좀 할 줄 안다. 민정과 민희 서로 경쟁이 붙어 나올 줄을 모른다.

여행 중 무엇이 재미있었냐고 하니 바구니배 탄 것이라고 했다. 하미마을은 월남전 때에 우리 국군이 민간인을 많이 학살했는데 이 마을도 그 중 하나다. 전쟁이라는 특수상황이었지만 거기에 대한 미안함이 항상 있었다. 이 마을에 가장 적절한 이 배를 관광 상품화 하자는 아이디어를 우리나라에서 냈고,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지금 이 곳은 가장 못 사는 마을에서 부자 마을이 되었고 일자리도 많이 생겼다. 이제는 베트남 국민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해줬는데 아직 민정 민희가 이해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아주머니는 헌 휴대폰을 정말 시기적절하게 주어 아이들의 여행을 더욱 풍성하게 해 줬다. 익산역 출발에서부터 동영상을 찍을 것은 찍고 사진으로 찍을 것은 찍어 매일 배터리가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고 아껴 찍자고 저희들 끼리 협상을 하곤 했다.

일행 중에 다섯 살짜리 어린애가 아빠랑 할아버지 할머니랑 왔다. 마사지를 받을 때 아이들은 받지 않으니 민정 민희가 그 아이를 데리고 놀았다. 얼마나 잘 놀아줬는지 그 아이가 밥 먹을 때도 우리 애들 옆에 앉아 먹겠다고 하고, 저의 아빠 손잡고 다니는 게 아니라 어느새 우리 애들 손을 잡고 있다. 그 애는 외동딸이라고 한다.

형제간이 많아 부모의 세세한 보살핌도 덜 받고 다른 애들 보다 외국 여행이 늦고 그 흔한 휴대폰도 없다. 여행 떠나기 전 해성에게 네 동생들만 데리고 가서 서운하냐고 물었다. “아니요, 저는 이미 다녀왔으니 동생들만 데리고 가셔요.” 라고 했다. 역시 큰 놈은 다르다. 힘껏 안아줬다.

형제들끼리 부대끼며 살면서 어디까지가 자기가 해야 할 일이고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또래 애들 보다 빨리 터득한 것 같다. 딸네 다섯 아이들이 지금 같이 반듯하고 배려할 줄 알며 자립심을 가지고 예쁘게 자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