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궁면장

채수훈

“월출산, 도갑사, 월남사지, 무위사, 다산초당, 백련사, 칠량면의 옹기마을, 사당리의 고려청자 가마터, 해남 대흥사의 일지암, 고산 윤선도 고택인 녹우당, 그리고 달마산 미황사와 땅끝(土末)에 이르는 이 답사길을 나는 언제부터인가 ‘남도 답사 일번지’라고 명명하였다. 사실 나의 표현에서 지역적 편애라는 협의를 피할 수만 있다면 나는 ‘남도 답사 일번지’가 아니라 ‘남한답사 일번지’라고 불렀을 답사의 진수처인 것이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 유산답사기(1)> 첫 장 ‘아름다운 월출산과 남도의 봄’에 나오는 글이다. 1996년 여름날에 이 책을 사 들고 아내와 결혼 전 2박 3일 일정으로 강진과 해남을 찾아갔다. 답사기와 첫 인연 이후 25년 동안 이 지역만 20번 정도 여행을 다녀왔다. 오늘날까지 대한민국 문화답사의 바이블인 유홍준의 <나의 문화 유산답사기(10권)>와 <답사 여행의 길잡이(13권)>를 가방에 넣고 전국을 누비며 다니고 있다.

익산에서 태어나 대학교까지 다녔고 생활한 지 40여 년이 되면서 고향의 역사?문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불과 10년 전의 일이다. 나이를 훔쳐 가면서 철이 들어가는지 ‘가장 향토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느낌이 시나브로 깨닫게 되었다. 굳이 타 지역 명산, 대사찰, 문화유적지를 찾지 않더라도 내 고향 익산 땅에서도 전국 역사?문화가 축소판처럼 온전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유홍준은 <나의 문화 유산답사기(1)> 서문에서 “우리나라는 전 국토가 박물관이다.”라고 했다. 이 말뜻을 깨닫는데 10여 년이 걸렸고 결국 익산 향토사에 애착을 갖는 변곡점이 되었다.
그 후 익산문화원, 익산시, 익산시립도서관 등에서 향토사 자료를 수집하였고, 틈만 나면 내 고장 역사 문화 유적지와 역사 문화 강의를 찾아다녔다. 2015년에 그간 써놓은 칼럼들을 모아서 <익산 시간여행>을 비매품으로 출간하였다. 수박 겉핥기식에 자만하지 않고, 땅의 생김새까지 천착하면서 옛 선조들이 생활했던 주거 공간까지 온전하게 느끼기 위한 발품 파는 답사를 마다하지 않았다.

아는 만큼 느끼고 느끼는 만큼 보인다고 하였듯이 관심과 애착을 갖고 현미경처럼 찾고 들여다보니까 과연 수백 번 다녔던 길도 언제나 초행길처럼 새로웠다. 조선 유한준의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란 말처럼 새롭게 그 의미를 터득하는 희열은 언어로써 형용하기가 어려웠다.

익산 향토 유적지는 아직 가보지 않은 곳과 만나야 할 사람 그리고 더 배워야 할 것이 많다. 책을 재출간할 계획을 세우고 거북이걸음으로 느릿느릿 걸어 나가고 있다. 그렇다면 나의 고향 익산의 ‘문화답사 일번지’는 과연 어디로 정하면 좋을까? 아니 <익산 시간여행>을 출간한다면 어느 지역을 답사 첫 장으로 장식할 것인가? 결국 첫 글의 답사지가 유홍준처럼 나의 ‘익산문화답사 일번지’라는 속마음이 아닐까 싶다.

익산시 29개 읍·면·동 중 ‘익산문화답사 일번지’를 꼽으라면 왕궁면을 엄지척하고 싶다. 이 지역은 익산 문명의 발상지 이자 고대 네 차례의 수도가 있었던 2천여 년의 고도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왕궁리 유적은 우리나라 4대 고도인 경주, 공주, 부여, 익산중 유일하게 궁터가 온전히 남아있는 곳이다. 유럽의 역사 문화 원류가 그리스·로마이듯 백제의 수도가 공주·부여·익산이었다면 익산의 역사 문화가 꽃피고 그 부활을 꿈꾸는 곳은 왕궁이다. 왕궁면은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왕궁이란 행정지명을 사용하고 있다.

왕궁면 역사 문화 답사는 세계유산인 왕궁리 유적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1km에 있는 왕실 사찰 제석사지, 마을마다 즐비한 선사유적지, 표옹 송영구의 망모당과 우산 정사, 근대 수리시설과 정자를 대표하는 왕궁저수지와 함벽정, 조선시대 익산의 관문 호남대로, 시대 산과 용화산, 익산 유일 소세양신도비와 익산 최초 소자파묘비로 이어지는 길은 산과 저수지, 들녘과 하천이 조화롭게 펼쳐져 있어서 한눈팔 틈이 없이 자동차로 10여 분 거리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왕궁의 겉모습만 보고 왕궁 역사?문화를 다 알거나 볼 것 없다고 한다면 왕궁터가 왜 왕궁면에 위치하게 됐는지 쉽게 수긍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고대 왕궁지역은 금남정맥의 한줄기가 익산으로 뻗어 내려온 끝자락이자 서해의 밀물 썰물과 만나는 지점으로써 내륙과 해양을 잇는 요충지였다. 그 중간 구릉에 선사유적지와 마한, 백제 궁터가 물결치듯이 위치하고 있다. 한 곳 한 곳 다니며 지형의 특성과 지명 유래를 찾다 보면 고대 지도가 머릿속에 그려진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온몸으로 체험할 때 비로소 알고 보이는 만큼 느끼게 된다. 왕궁의 속살을 들여다보면 왜 익산문화답사 일번지 인지 절로 고개가 끄덕이지 않을까 한다.

지금까지 왕궁의 역사 문화는 백제 궁터인 왕궁리 유적만 부각되어 왔다. 면 전체를 놓고 볼 때 답사 프로그램을 기획한다면 하루, 이틀 정도 다녀야만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 실제 지난 9월에 <왕궁면지> 편찬을 위한 조사·집필 위원, 전문가, 공무원 등 10여 명이 최초 지역 답사를 하였다. 11월에 왕궁면 주민자치 위원회 위원 20여 명이 워크숍 일환으로 지역탐방을 익산문화해설사 안내로 실시하였다. 두 번 경험상 하루는 시간이 촉박하고, 이틀 정도 일정이면 여유 있게 둘러볼 수 있는 답사처라 할 수 있다.

유홍준은 <나의 문화답사기(3)>의 ‘이루어지지 않은 왕도의 꿈’에서 호남답사에서 거의 빠짐없이 미륵사지를 들렸다고 했다. 1997년 책 출간 당시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2015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미륵사지와 왕궁리 유적이 나란히 등재되면서 왕궁면은 더 이상 변방이자 숨은 보석이 아닌 익산 문화유산 답사의 보배스러운 곳이 되었다.
왕궁면은 전 지역이 향토박물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