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복순 윤약국약사

시어머니 뵌 지 한 달도 넘었다. 시어머니 면회까지 생략하면서 순례길만 걷는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지난 일요일 조금 일찍 돌아왔기에 바로 시어머니가 계시는 요양병원으로 갔다. 나를 보자 깜짝 반가워 하셨다. 시모의 얼굴이 예전보다 좋아 보였다.

한참 손을 비빈 후 잡았지만 “왜 이렇게 손이 차냐?” 금방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배가 아프다고 했다. 옷 위로 여기요? 여기요? 하며 위(胃)인지 장인지 가늠을 해 보는데 당신 옷을 위로 올리더니 맨살을 만지라고 했다. 쪼글쪼글한 뱃가죽이 추워서 닭살이 돋았다. 손이 차서 안 된다며 얼른 옷을 내려드리니 내 손이 너무 차서 당신 가슴에 넣어서 녹여줄려고 그랬단다.

치매라는 괴물이 시어머니의 뇌를 야금야금 갉아먹어 때로는 며느리도 몰라보면서도 어머니의 본능인 사랑만은 남아있다는 생각에 눈이 촉촉해져 잠깐 밖으로 나왔다.

다시 들어가니 애들은 잘 크냐고 물었다. 이 말은 내가 갈 때마다 묻는 고정 멘트다. 보통 때는 애들은 다 커서 시집가고 장가갔다고 말씀드리는데 그날은 그렇다고 고개까지 끄덕이며 대답했다. 시어머니 얼굴이 환해지며 생기가 돌고 기분이 들떠 “애들 잘 크지?” 또 물으셨다.

결혼하고 약국을 개업하면서 애들을 시어머니께서 키웠다. 애들은 잔병치레 한 번 없이 잘 자랐다. 시어머니는 애들에게 따뜻한 밥을 먹인다고 매끼 밥을 했으며 제 철 음식을 만들기 위해 매일 시장을 다녔다. 얼굴은 항상 함박웃음이셨다.

아들이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고등학교 동창이 약국에 들어오면서 우리 집 때문에 정말 재미있었다면서 크게 웃었다. 어느 날 자기 아들이 저희 반에 박상훈이라는 애가 있는데 공부도 잘하고 예뻐서 짝꿍 했으면 좋겠고 엄마가 선생님한테 말 좀 해주면 안 되겠냐고 하더란다. 자기 아들도 공부 잘하고 예쁘다고 했다.

“근데 걔가 이상해. 아빠네 집 갔다 왔다고 하고, 엄마네 집에도 갔다 왔다고 해. 그리고 할머니랑 할아버지랑 살아.” 순간 혹시? 하는 생각이 들었단다. 퇴근하는 남편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그것들 이혼했그만 뭐. 그런 집 애들하고 친하게 지내서 좋을 것 없어”하면서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더란다.

곰곰 생각하다 자기 아들에게 그 얘를 집에 한 번 데리고 오라고 약속 날을 잡았단다. 우리 아들을 보는 순간 짠한 마음이 들어 의식적으로 예뻐해 주면서 조심스럽게

“아빠는 뭐 하시니?”

“군인 이예요.”

“엄마는?”

“약국해요.”

“익산에서?”

“예, 윤약국요.”

“그럼 너희 엄마가 윤복순이니?”

그래서 저희 아들하고 우리 아들이 짝꿍을 한다고, 할머니가 키우는데도 예의바르더라고, 얼굴에 구김이 없더라고. 그 후 가끔 그 친구가 약국에 들러 아들의 학교생활을 이야기 해 주었다.

그 당시 나는 주말부부였다. 토요일 남편한테 가면서 애들을 데리고 다녔는데 아들이 군대 짚차 타는 것을 아주 좋아했었다. 남편 관사에 가면 짚차를 보고 운전병 아저씨를 많이 좋아했으니 아빠네 집이라고 한 것 같고, 약국에 어쩌다 나오는 것을 엄마네 집이라고 한 것 같다.

시어머니 덕분에 애들은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아 서로 짝꿍을 하고 싶어 했고, 선생님들께도 칭찬을 받았다. 학년말이면 선생님이 우리 애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시모는 거짓말을 용납하지 않았고 칭찬을 많이 해 주셨으며 공부가 조금 떨어져도 혼내는 것 보다 더 잘 할 수 있다고 용기를 주었다. 특히 말할 때 존칭을 쓰지 않으면 바로 그 자리에서 잡아 주었다. 하나하나 예를 들어가면서.

손은 많이 녹았다. 다시 시모의 손을 잡아드렸다.

“내가 왜 이렇게 기분이 좋다냐?” 내 손을 흔들면서 “쎄쎄쎄, 아침바람 찬바람에......” 손동작까지 하며 노래를 부른다. 당신 손녀 손자를 키울 때 했던 것처럼.

흔히들 자식 키울 때는 사는 게 바빠 예쁜지도 모르고 키웠다고 한다. 그런데 손자는 기가 막히게 예쁘단다. 시어머니도 웃을 거리 없이 건조하게 사실 때 큰며느리인 내가 딸 아들을 낳으니 아주 좋아 했었다. 그 예쁜 것들을 당신이 키우고 학교에 보내고 비가 오면 우산 가지고 마중을 나가고 학교에 갈 일이 생기면 다 다녔다.

어린 것들이 언 손으로 학교에서 돌아오면 당신 젖가슴에 손을 넣어 녹여주고, 애들과 노래를 부르며 같이 놀아주고, 같이 숙제를 하고, 애들이 먹고 싶어 하는 것들을 같이 만들었다.

나는 이론과 이상으로 애들을 키우려 했지만 시모는 지금까지 살아온 당신의 경험으로 키웠다. 할머니와 있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애들은 지혜롭고 여유로운 아이로 자랐다. 애들을 키우느라 많이 고단했을 텐데 그래도 그 때가 행복하셨는지 시모는 내가 면회 갈 때 마다 “애들 잘 크지?” 하고 묻는다.

당신의 시계는 그 시절에 멈춰있는데 딸 아들은 객지에서 가정을 이뤄, 저희 아이들을 키우며 직장생활 하느라 자주 내려오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