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복순 윤약국약사

오랜만에 합창 연습에 갔다. 작년 약사연수교육 때이었으니 일 년 만이다. 한 달에 두 번, 둘째 넷째 일요일이 연습 날이다. 올해도 연수교육 날에 합창공연을 한다.

벌써 4년 되었다. 처음 ‘전북 약사 칸타빌레 합창단’이 만들어질 때 생각이 난다. 나의 노래실력은 “이리여고에는 음악시간이 없냐?”는 소리를 듣는 수준이다. 이런 실력으로 어찌 감히 합창단을 할 수 있으랴. 당연히 남의 나라 얘기로만 알았다.

내 기사에게 매일 연락이 왔다. 꼭 합창단에 나와야 한다고. 기사가 가면 당연지사 나는 가게 된다. 나는 차가 없어 전주까지 혼자서는 갈 수가 없다. 기사는 여고 후배다. 그녀의 실력도 나와 막상막하다.

두어 달이 흘렀고 한 번만 나와 보라는 성화에 ‘한 번 가볼까.’ 무슨 큰 은혜라도 베푸는 양 갔다. 서울대 출신 어느 선생님의 음악실이다. 연습할 곳이 없어 그곳에서 했다.

아아아아아 우우우우우 발성연습부터 했다. 지휘자 선생님이 파마를 한 긴 머리였는데 턱 보아도 예술가였다. 연륜에서 묻어나는 중후한 남성이 풍기는 그 포스가 경외심을 일으키게 했다. 이 분이 이 음악실의 주인이라고 생각했다.

서울대 나온 성악 선생님으로부터 레슨을 받는다는 자부심이 생겼다. 무엇보다 오디션이 없어 나 같은 사람도 합창단원이 될 수 있었다. 가던 날이 장날이라고 그 날 합창단 드레스를 맞추는 날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꼭 오라고 했던 모양이다.

드레스! 얼마 만에 입어보는 옷이냐? 결혼식 때 입어보고 처음이니 모든 여약사들이 한껏 들떠서 마치 파티장 같았다. 엉겁결에 나도 맞췄다.

지휘자는 테너로 지휘는 물론 발성, 음악의 기본, 입모양, 숨쉬기, 눈 모양 콧구멍까지 얼굴 표정 하나하나 알려주었다. 여자들을 위해 소프라노 선생을 따로 모셨고 피아노 선생도 패키지로 왔다. 합창단은 남약사도 있어 혼성 합창단이다.

처음 해보는 음악이라 흥분도 되고 재미도 있는데 음이 올라가지 않았다.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포도밭에서 밭을 맨 것보다 더 온몸이 조여들었다. 입이 바싹바싹 마르고 몸살이 날 것 같고 온 에너지가 고갈됨을 느꼈다.

단원 수가 많지 않았다. 그들은 학창 시절 음악시간이 좋았고 악보를 볼 줄 알기 때문인지 피아노 소리만 듣고도 바로 따라 불렀다. 나는 괜히 합창단에 피해만 주는 것 같아 고음에선 입 모양만 하고 소리는 내지 않았다. 이 실력으로 합창을 해야 할까 회의심이 들었다.

괜히 드레스를 맞췄다고 후회를 하다 명분이 떠올랐다. 합창이지 않은가. 아무리 잘 해도 그 숫자가 많지 않으면 그것은 합창이 아니다. 자리를 채워주자. 명분이 생기자 자신만만해졌고 주눅들 필요가 없었다.

자리만 채워주기로 하니 연습시간에 많이 빠지게 되었다. 그래도 무대에는 꼭 선다. 그림이 좋아야 하니까. 음악교실에 다니는 친구나 여고시절 음악시간을 주름잡았던 사람들이 자기 영웅담을 얘기할 때면 “자기는 서울대 나온 선생님한테 레슨 받아봤어?” 하며 기를 죽이곤 했다.

전국 여약사대회 때였다. 각 지부의 장기자랑시간에 전북팀은 합창을 하기로 했다. 서울 지역의 많은 약사들이 우리 지휘자 선생을 알아보고 악수를 하고 난리다. 어찌 저리 잘 알까. 정말 유명한 선생인가 보다. 그런데 그는 서울대 나온 성악가가 아니고 약사였던 것이다.

그날 우리는 정말 잘 불렀고 이등을 했다. 지휘자가 너무 멋져 초빙해 온 줄 알았던 약사들이 그가 약사라는 사실에 공연장은 술렁술렁했다. 그날의 킹은 대한 약사회장이 아니라 바로 그였다.

전국 약사 합창 제날 후배가 드레스를 입은 독사진을 찍어줬다. 그녀는 사진작가에 버금갈 실력자다. 모처럼 화장까지 한, 뚱뚱하지만 각도를 잘 잡아, 자연스레 웃고 있는 나를 잘도 담아냈다. 아주 잘 나왔다고 현상해 액자까지 만들어 선물로 주었다. 나도 대만족이다.

사진이 닳아 없어지는 것이라면 이미 누더기가 됐을 만큼 자랑을 했다. 노래를 부를 때 박자를 놓치거나 음정이 불안할 때면 웃는 버릇이 생겼다. 남들이 볼 때는 표정이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는지 지난번 공연 끝내고 나올 때 나를 붙잡고 몇 년이나 연습했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누구든지 내 앞에서 노래 잘 부른다고 잘난 체를 하면 슬그머니 후배가 찍어준 사진을 내보인다. 빨간 드레스를 입은, 약국에서 보던 것과 너무 다른 모습에 깜짝 놀란다. 잘 나왔다고 약국 제일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두지 왜 숨겨 좋으냐고 야단이다. 이쯤 되면 실력은 두 번째다.

연습하러 못 가기 때문에 약국에서 합창에 할 음악을 따라 부른다. 점심시간에 큰 소리로 틀어 놓으니 사람들은 내가 노래 잘 부르고 음악을 많이 좋아하는 줄 안다. 무늬만 합창단원인 줄도 모르고.

초창기 회원들 중 매달 연습을 한 사람들은 장족의 발전을 했고 약사회관에 피아노를 들여놓아 명실상부한 연습실도 생겼다. 음악을 좋아하는 약사들이 입단을 해 단원도 늘었다.

드레스가 두 벌이라고, 무슨무슨 무대에 섰다고, 창단 멤버라고 빈 깡통만 울리지 말고 나도 실력으로 합창 무대에 설 수 있었으면 좋겠다. 타고난 것이 음치이다 보니, 못한다고 노력도 안 하다 보니, 나이까지 먹다 보니 잘하는 것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진다.

향수 악보를 펴고 가사를 음미해 본다. 컴퓨터를 켰다. 명창이 되려면 귀명창이 먼저 되어야 한다고 하지 않던가. 여러 번 듣고 가사부터 외우자. 연수교육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