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 사람들 > 작은집 잔치에

작은집 잔치에

윤복순 윤약국약사

큰집 잔치에 작은집 돼지 잡는다는 속담이 있다. 집안의 제일 큰집에서 치르는 잔치에 잔치하고 아무 상관도 없는 작은집 돼지를 잡아서 먹는다는 뜻으로, 남에게 매여 지내는 탓에 아무 관계도 없는 일에 억울하게 희생된다는 뜻이다.

나는 장손 며느리이고 시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시어머니는 요양병원에 계신다. 작은 아버지 세분은 가까이 전주 군산에 사시고 고모 세분은 서울과 부산에 계신다.

작은집에 무슨 잔치가 있을 때면, 사촌들의 결혼이라든지 작은아버지나 작은어머니 칠순이어서 고모들이 오시면, 남편이 꼭 우리 집에 들렀다 가셔야 한다고 다 모시고 온다. 작은어머니들이나 고모들은 또 기쁜 마음으로 와서 시어머니를 뵙고 일박을 하고 간다.

나는 살림 못하기로 유명하고 집도 귀신이 오백 마리는 나오게 하고 사는데 이럴 때마다 비상이 걸린다.

며칠 전이다. 가운데 작은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칠십 초반이다. 지금까지는 즐거운 일로 모였는데, 이번에는 어처구니없는 일이라 기운이 빠지고 할 말을 찾기도 힘들어 더욱 피곤한 날이 되었다.

어버이날이 출상 날이었다. 아무래도 장지에서 우리 집으로 오실 것 같아 마음이 바빴다. 전날도 장례예식장에서 늦게 돌아왔다. 요즘은 포도 농사철이어서 눈코 뜰 새가 없다. 출근하기 전에 청소라도 하려고 아침운동은 생략했다.

화장실 청소를 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린다. 며느리다. 어버이날이라고 한 전화다. 쌍둥이 키우느라 이번 문상에도 아들만 다녀갔다. 애들 조금만 더 크면 자주 내려가겠다며 죄송하다고, 아버님이랑 맛있는 것 사 드시고 건강하시라고 전화했단다.

이만저만해서 아침도 못 먹고 청소만 열나게 하고 있다고 하니 “어떻게 해요. 아들 며느리도 있고 손자 손녀까지 다 봐서 대접받으셔야 되는데 지금도 이렇게 고생을 하셔서요?” 한다.

작은 집들이야 가까이 사니까 자주 만날 수 있지만, 고모들은 먼 길 나들이에 바로 올라가시기는 좀 서운하다는 생각으로 우리 집으로 모시기 시작했다. 가까운 관광지를 구경시켜드리고 맛 집 음식도 사 드리며 하루를 같이 보낸다. 조카 덕분에 호강한다고 그렇게 좋아하실 수가 없다.

고모랑 작은 어머니들은 시누올케라기보다는 친 자매처럼 사이가 좋다. 농담도 잘하고 만나면 시끌벅적하니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어느 해인가 가운데 고모가 아무것도 아닌 남편과 나를 얼마나 자랑했는지, 고모 친구가 익산 한 번 가보고 싶다고 해 데리고 온 적도 있다. 우리 집에서 자고 포도밭도 구경하고 포도도 가지고 갔다.

이번에도 아들 며느리가 어버이날이라고 배달시킨 꽃바구니를 앞에 두고 사진을 찍어주겠단다. 나는 사진 찍는 것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친구에게 자랑해야 하니까 어서 서라고 야단이다. 어른들은 별 걸 다 자랑하고 싶은가 보다.

저녁식사를 하고 집으로 올라갔다. 아침까지 아무 이상 없던 보일러가 돌아가지 않는다. 비가 오고 아침저녁으로 쌀쌀해서 그냥은 못 잔다. 다들 노인이신데 걱정이다.

남편이 뒤 베란다 보일러실에 가더니 물이 넘쳐 한강이 되었다고 한다. 여관이라도 가야 하나? 보일러는 왜 이럴 때 고장이 날까. 결정적인 순간에 곤란한 일이 생겨 순발력이나 인내심을 시험할 때가 종종 있다.

화장실과 방만으로는 모자라 뒤 베란다 청소까지 시킨다. 어떻게 자야 하나 머릿속이 복잡할 때 갑자기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가 난다. 보일러가 나를 봐주는 모양이다.

고마움도 잠시 밤새도록 보일러가 돌아 방이 찜질방이 되었다. 보일러의 전원을 꺼도 소용이 없다. 더워서 다들 중간에 잠이 깼다.

집에서 주무시면 아침식사가 문제다. 지금까지는 어찌어찌 내가 준비를 했는데 이번에는 용기를 내 콩나물국밥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남편은 이미 포도밭으로 출근했다. 잘 생각했다고 모두 좋아하신다. 나이 먹어가는 장조카 며느리가 안쓰러우신 모양이다.

일요일이 아닌 데다 농사일까지 바빠 모시고 다니며 구경시켜 드릴 수가 없다. 건강하시라고 종합비타민을 한 갑씩 드렸다. 나로선 제일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인데 돈 많이 써서 어떻게 하냐고 걱정을 하신다.

살아보니 몸이 편하면 마음이 불편하고, 내 몸이 좀 고생하면 주변 사람들의 마음이 즐겁다는 것을 알았다. 무리하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최선을 다 했을 때 나도 만족하고 행복하다는 것도 깨달았다. 내가 행복해야 남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

작은집 사촌들 중 막내 작은아버지네 아들만 아직 장가를 가지 않았다. 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들도 모두 칠순을 넘겼다. 지금까지 작은집 잔치가 있을 때마다 크고 작은 돼지를 잡았지만 크게 희생당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작은 아버지 한 분과 작은어머니 한 분이 벌써 돌아가셨다. 작은집 잔치에 돼지 잡을 일도 몇 번 남지 않았다. 작은어머니 고모들이 가셨다. 마음이 한갓질 줄 알았는데 왜 허허롭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