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중 전 익산경찰서장

공인행정사

날씨 좋은 어느 날, 어미 돼지가 새끼 아홉 마리를 데리고 나들이를 떠났습니다. 강을 건너기 전에 세어 보았더니 자기까지 합쳐서 열 마리였습니다. 그런데 강을 건너서 다시 세었더니 아홉 마리입니다. 새끼 돼지들을 모두 살폈지만 잃어버린 녀석이 없어 두 번 세고 세 번 세고 또 세어 보았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아홉뿐이라 어미 돼지는 속상하고 다급하였으나 강가를 떠나지 못하고 울다 울다 지쳐 죽고 말았습니다. 자기를 셈에 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웃기고 슬픈 사연을 일컬어 ‘어미 돼지의 지혜’라고 풍자합니다.

몇 년 전 우리 나라 공직자들의 보안수준을 한층 높인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공무원 시험 응시자가 정부 청사에 잠입해서 자기 시험 성적을 고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언론에서는 정부 청사의 보안이 뚫렸다고 대서특필을 하였지만, 사실은 뚫린 게 아니었습니다. 관련 공무원 누구도 보안을 지키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범인은 문을 잠근 자동 자물쇠 아래에 써서 붙여놓은 비밀번호를 보고 그냥 열고 들어갔다고 합니다. 컴퓨터 아래에도 모두 아이디와 비밀번호가 적혀 있었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문에 비밀번호를 붙여놓은 이유가 청소부나 요구르트 배달 아주머니들이 편하게 들어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누구나 보안을 지켜야 한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자기와는 별 해당 사항이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외국 선진국에 다녀온 사람들이 운전하면서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다녀온 나라는 정말 사람 중심이더군요. 횡단보도를 건널 때 차들이 기다려 주고요. 차선을 바꾸려고 깜빡이를 켜면 뒤따르는 차들이 모두 속도를 줄여줘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아직 후진국이예요. 오히려 속도를 높이잖아요. 우리나라는 아직 멀었어요.”
낮은 시민의식이 큰 문제라며 한국을 비판하는 말들을 입에 거품을 물고 해댑니다. 진짜 문제는 그러면서도 막상 자신이 운전대를 잡으면 후진국형이 되고 맙니다. 말 따로 행동 따로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공정과 상식을 부르짖었던 정치인의 부인이 공정하지도 상식적이지도 못한 행위를 하고 “잘 보이려 경력 부풀리고 잘못 있었다. 부디 노여움을 거두어주십시오.”라며 사과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우리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참으로 묘한 기분에 빠집니다. 자신을 셈에서 빼는 사회, 우리 사회는 책임지지 않으려는 사회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민감한 책임성은 사라지고 모두 물 위에 떠 있는 부표처럼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우리는 흔히 무슨 일을 할 때 선례가 없거나 지시 내용이 없으면 일을 자발적으로 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이놈의 ‘선례’와 ‘형평성’만 찾다가 모두 함께 얼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선례를 찾기만 하지 새로운 선례를 만들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러다 보니 자기 자신이 주체가 되지 못하고 늘 3자적 입장에서 분석하고 비판하고 해석하는 사람만 남습니다. 궁금증이나 호기심 같은 원초적인 힘이 사라집니다.

종속적 주체는 자신의 주인 자리를 신념이나 이념 혹은 가치관에 양보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자아와 자신을 이끄는 자아와 분리되어 있습니다. 이런 분리 상태에 있는 사람은 자발적이고 책임성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이미 정해져 있는 신념을 수행하거나 지키려는 것보다 자아를 실현하려 애쓰는 사람만이 자기 자신으로 능동적 주체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어미 돼지보다는 더 총명한 듯 보이지만 그래도 역시 서두르다 보니 다급한 나머지 자신을 셈에 넣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결국 내가 나로 존재하느냐, 그러지 못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내가 나로 존재하는 사람은 야쿠르트에 영혼을 팔지 않습니다.

서툰 서양의 생활방식을 자랑하지도 않고 내면화되지 않는 정의와 공정을 부르짖지도 않습니다. 선례만 찾거나 부패하지 않습니다. 결국, 자신의 존재성에 대한 각성이 사라져 예민함을 상실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들입니다. 하기야 세상에 이런 일들이 없다면 배꼽 쥐고 웃을 기회가 또 어디 있겠냐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