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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 종주기

윤복순 윤약국약사

해피로드다. 이미 해는 지고 강 건너 산 그림자가 금강으로 쉬러 들어왔다. 물속에 잠든 산들이 참 예쁘다고 계림의 이강보다 아름답다고 감탄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주위가 깜깜해졌다. 대청댐임을 알리는 불빛만 반짝일 뿐이다. 대청댐 까지 2Km라는 푯말을 막 지났다.

딸네 쌍둥이들이 아직 어려 시댁에서도 설 쇠러 오지 말라고 했다고 해 나도 그러라고 했다. 차례를 지내고 산소를 다녀온 후, 아들과 딸네 집으로 가 늦은 저녁을 먹고 아들 며느리는 서울로 올라갔다.

오랜만에 만난 손자 손녀들과 노느라, 잠자리가 바뀌어 뒤척이다 늦잠을 잤다. 오늘 걸어야 할 거리가 30여 Km인데 세종에 도착하니 벌써 정오다. 설날 연휴라서 김밥집이 모두 문을 닫았고 배낭 속엔 물 밖에 없어 걱정이 되었지만 서둘러 출발했다.

군산 둘레길을 걷다 금강 자전거길을 알게 되었다. 군산하구둑에서 대청댐까지 그 길이가 약 146Km이다. 이 구간을 걸어 보기로 했다. 일요일만 할 수 있고 포도농사가 없는 겨울철에만 가능했다.

부여에서 공주까지 걸을 때다. 그 거리가 만만치 않아 하루에 걸을 수 없어 탄천에서 버스를 타기로 했다. 금강변에서 나와 지방도로를 걷는데 어떤 거리표시도 없고, 삼거리에선 어느 방향으로 가야 면소제지가 나오는지 몰라 암담했었다.

시골의 겨울은 밤이 일찍 오고 거리에 사람이 없어 어려움은 두 배다. 굽어진 길임을 표시하는 야광 표지판으로 방향을 잡았는데 옳은 판단이었다. 그래도 버스 타는 곳까지 두 시간이 걸렸다.

나는 걷는 것을 좋아한다. 기술을 요하지도 않고 장비나 기구도 필요 없고 작전도 필요 없다. 장자크 루소는 “나는 걸을 때만 명상할 수 있다. 걸음을 멈추면 생각도 멈춘다. 나의 정신은 오직 나의 다리와 함께 움직인다.” 이런 말을 했는데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걷는다.

차를 타고 휙 가는 것보다 주변을 잘 볼 수 있고 그 만큼 추억도 많이 만든다. 모두 빠르고 편한 것을 좋아하는 요즘에 일요일 하루쯤은 느리게 그리고 편리함을 벗어놓는 것도 좋겠다 싶어 걷는다.

걸으면서 여유를 찾고 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들에게서 투박하지만 진심이 우러난 친절을 배운다. 느리고 완만함에서 내 성격도 동글동글 해졌다. 걸으면서 체력이 좋아졌고 그 체력에서 지구력도 생기고 자신감도 얻었다. 자신감은 긍정적 마인드를 키워주고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알게 한다.

금강변의 아름다움에 행복했고 내려쬐는 햇살에 부유했다. 성당포구에서 강경까지 걸을 때는 갈대에 취해 세계적인 성악가도 해보지 못한 갈대밭 무대에서 독창회도 가졌다. 그냥 노래가 나오고 절로 양팔이 벌려졌다. “갈대밭이 보이는 언덕 통나무집 창가에........” 약사합창제때 부른 노래다.

강경까지는 익산의 시내버스 한 번으로 해결이 되었다. 부여에서 익산 오는 방법을 몰라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았는데, 날이 저물어 마음이 바쁘고 타지라서 불안감에 버스 행선지를 보기 전에 기사에게 물어보게 되었다. 내가 한글을 몰라 그러는 줄 알고 “나 타는 차만 타면 된다.”며 도와주던 아저씨. 강경 버스가 왔을 때 나를 앞에 세워 먼저 타게 해주던 아저씨의 마음 씀이 지금도 따뜻하게 남아 있다.

공주에서 세종은 가까웠다. 세종에서 대전도 교통이 편리해 일정이 빨리 끝나, 계룡에 사는 남편 동기와 저녁을 같이 했다. 퇴직하고 나니 전화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며 굉장히 반가워했다. 금강 걷기만큼이나 행복한 저녁식사 시간이었다.

금강 걷기 마지막 코스인 오늘 모두 설 연휴에 들어가 점심 먹을 곳이 없었다. 이런 상태로 하루 종일 걸을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는데 가게를 겸한 식당을 발견했다. 가게 문이 열려 있어 눈이 번쩍 뜨였다.

“밥 좀 먹을 수 있을까요?” 밥은 안 되고 칼국수만 된단다. 식사까진 기대하지 않았고 간단한 요기 거리라도 살 수 있기를 바랐는데 참으로 행운이다. 감사하다고 열 번 쯤 했다. 대청댐까지는 절반 정도 왔는데 고마우신 아주머니 덕분에 충분한 에너지를 얻었다.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해결책은 있다는 것을 알려준 것 같아 기분 좋았다.

어느 해 추석 전날 약국 문을 열고 늦게까지 근무했다. 그 때 내 나이쯤 되어 보이는 아저씨가 “고맙습니다. 약사님 나이에 돈이 없어서 오늘 같은 날 문을 열으셨겠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하며 고개까지 숙이셨다. ‘저 아저씨도 나정도 사는가 보다.’ 이런 생각을 했었다. 말이 곧 사람임을 그 아저씨를 보며 확실하게 배웠다.

최종 목적지인 대청댐은 밟지 못했다. 종주가 계획대로 되지 않았지만 구간 구간마다 최선을 다했고 그 과정을 마음껏 즐겼다. 어느 해 구룡산에서 현암사로 내려와 대청댐에서 점심을 먹었다. 계족산에서, 장령산에서, 청남대에서 대청댐을 보았고 견학도 갔었으니 이쯤에서 접으련다.

금강 자전거길 종주에 2Km의 아쉬움을 남겼다. 사위가 마중을 나와 딸네 집으로 들어갔다. 딸이 대전에 살고 있으니 이 정도의 미완성은 따뜻한 봄날 손자 손녀들과 대미를 장식해야겠다는 기대감으로 남겨 두어도 좋을 성 싶다. 이 길은 해피로드다.

금강을 걸으면서 새로운 목표도 생겼다. 생전에 통일이 된다면 해남 땅끝마을에서 백두산까지 걷는 거다. 그때는 나도 퇴직을 했을 거고, 매일 걸어야 되니 하루 15~20Km정도 걷고, 지치면 하루쯤 쉬고, 역사 문화의 도시에선 구경도 하고, 밥은 사먹고 잠은 여관에서 자고.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쿵쿵 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