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복순 윤약국약사

오랜만에 망해사에 갔다. 이맘때 이 길은 참 예쁘다. 길가엔 코스모스가 쫙 피어있다. 그 길이 넓지 않고 직선길이 아니어서 더 정겹고 애틋하고 멋스럽다. 양쪽은 김제만경평야다. 황금들녘이란 말이 실감난다.

망해사는 진봉산자락에 위치한 조그마한 사찰이다. 절 앞마당이 바로 바다다. 김제시의 코 부분에 해당하는데 진봉산에서는 바다와 지평선의 평야를 동시에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망해사의 낙조는 서해안에서도 알아주는 명소다. 우리 포도밭에서 가깝다는 것이 제일 좋은 점이다.

6년 전 포도농사를 마무리할 때 서울에 사는 과장님 내외분 동료부부들을 포도밭으로 초대했다. 그들은 남편과 한 사무실에서 근무했고 그 때 남편의 직급이 제일 낮았고 나이도 그들보다 한참 어리다. 이들과는 25년 넘게 친하게 지내고 있다.

포도밭에서 점심을 먹고 서울에 가지고 갈 포도를 따고 그간의 이야기를 나누는, 가을만큼이나 넉넉하고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후배약사인 S가 그날 포도밭으로 놀러가도 좋으냐고 물었고 나는 괜찮다고 했다. 또 누구를 데리고 가도 좋으냐고 물었고 나는 또 좋다고 했다.

서울사람들과 이야기꽃이 한창일 때 S가 도착했다. S는 처음 보는 두 사람을 데리고 왔다. 모두 글 쓰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방에서 포도를 먹으며 얘기하다 갑자기 망해사에 가자는 말이 나왔다.

서울사람들과도 놀아야 하고 또 이들과도 시간을 보내야 하니 순간 결정이 쉽지 않았다. 서울사람들과는 오랜 친구이니 이해해 주겠지 하는 믿음으로 이들과 망해사를 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날씨는 전형적인 가을 날씨였고 그 해 일기가 좋았는지 코스모스의 상태도 최상이었다. 여기저기 차를 바치고 사진을 찍느라 야단이었다. 물론 우리도 찍었다. 망해사까지 가는 길은 주말의 고속도로 같은 체증이 이었다. 우리는 길이 좀 막히기로서니 중도에서 돌아올 사람들은 아니다. 모두 경치에 취하고 분위기에 취해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몰랐다.

망해사는 조촐하지만 결코 건성으로 구경할 그런 절은 아니다. 그때 새만금 공사로 앞의 바다가 물을 잃고 갯벌이 말라 사막화가 되어가고 있어, 우리들은 대단한 환경운동가라도 되는 냥 열변을 토했고, 안타까움에 쉬 발길을 돌리지 못했을 것이다. 바닷물이 넘실댈 때는 많이 풍요롭고 풍성했는데 그런 모습은 간 데 없고 삭막하고 적막하고 황량하기까지 했다.

어쩌면 그 아름다운 일몰을 더 보고 싶어 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분위기에서 나만 서울사람들이 몇 시쯤 출발할까 마음이 바빴다.

돌아오는 길은 더 복잡했다. 그때서야 모두들 너무 시간이 걸린 것 같다고 걱정을 했다. 미안한 마음으로 걱정하는 마음으로 포도밭으로 돌아왔다.

남편이 나를 보자마자 “지금 정신이 있는 거야?” 하며 화를 냈다.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S야 잘 알고 지내지만 다른 두 사람은 처음 만난 사람인데, 이런 모습 보이면 안 되는데, 염치가 없어서 내가 어디로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식간에 모두 얼굴이 굳어졌다. 망해사에서의 행복은 남편의 고성으로 유리조각이 깨어지듯 쨍하고 금이 갔다. 숨쉬기조차 힘이 들었다.

S가 두 사람에게 포도를 선물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남편 눈치 보느라 그런 생각도 못했다. S가 얼른 두 사람을 데리고 갔다.

서울사람들이 늦게 출발하면 길이 막혀 오밤중에 도착한다고 나도 안보고 그냥 떠났단다. 먼 곳에 사는 사람들을 초대해 놓고 내가 시간을 많이 비우니 그 사람들이 일찍 갔다고, 내 친구들은 같은 지역 사람들이니 다음 주라도 다시 만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 남편의 주장이었다.

남편 입장이 이해는 되지만 그렇다고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나를 그렇게 야단쳐도 되는지 참으로 야속했다. 이미 서울사람들은 출발했고 화가 나지만 내 체면 좀 세워주면 안 되었을까. 그러면 나는 사람이 아닌 부처와 결혼 한 것이 되나?

나는 간이 푹 죽은 배추같이 늘어졌고 어른들 말대로 넋이 빠졌다. 이런 판국에 남편은 사모님한테 어디쯤 가시는지, 떠나실 때 못 뵈어서 죄송하다고 전화를 드리란다. 이를 깨물며 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사모님은 기다려도 내가 오지 않아 무슨 사고라도 낫나 걱정을 했다며 잘 돌아왔으면 됐다고 이제 안심이라고 하셨다.

며칠 뒤 S에게 전화를 해 같이 식사나 하자고 했다. S도 결혼생활 몇 십 년차 아내인데 내 입장을 이해해 줄 것 같았다. 고맙게도 그들이 같이 밥을 먹었다. 그러나 그 일에 대해선 나는 언제나 죄인이다. 그날 기분을 그리 망쳐놓았으니.

그 뒤로 포도밭을 이전하느라 3~4년 수확하지 못했다. 작년에도 첫해라서 포도가 조금밖에 나오지 않았다.

지난 일요일 과장님을 비롯한 서울사람들을 포도밭으로 초대했다. 그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오셨고 우리부부 또한 진심으로 환영했다. 포도밭을 둘러보고 조심스럽게 망해사 구경을 가자고 했다. 6년 전 그날 서울사람들에게 미안했던 마음을 담아서.

나는 고해성사를 하듯 그날 얘기를 했다. 이렇게 아름다우니 시간가는 줄 몰랐을 것은 당연하단다. 그리고 처음 만난 그 사람들과 시간 보낸 것도 잘 한 일이란다. 당신들도 그랬을 거란다.

망해사 앞 바다는 이제 담수호가 되어 물길을 만들고 무더기 무더기 갈대밭이 조성되었다. 황량했던 맨살의 사막은 온데 간데 없고 순천만 같은 아름다움이 있다.

엊그제 S와 수목원에서 깁밥으로 점심을 같이 했다. 포도 파느라 점심약속을 거의 잡지 않았는데 S의 부름에는 기꺼이 달려갔다. S에게 망해사에 다녀왔다며 그 서울사람들이 왔었다고 하니, “지금은 이렇게 웃으며 말 할 수 있는데 그때는 정말 불편했었다.”고 했다. 그날 그 시간 불쾌하지 않은 사람 있었을까.

망해사 앞바다에 갈대가 또 다른 아름다움으로 자리 잡았듯이 그날 불편하고 불쾌했던 마음도 어느 해 이런 일도 있었다는 추억으로 간직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