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복순 윤약국약사

어쩌다 한 번씩 약을 사러 오는 아줌마가 있다. 옷도 세련되게 입고 아는 것도 많아 약을 소개하니 공부 좀 하고 다시 오겠다며 나간다. 다음날 와서는 내가 이미 설명을 다 해 주었기에 쉽게 약을 산다. 카드를 줘 할부 할 것이냐고 물으니 3개월로 해 주란다. 그날 돈을 많이 썼단다.

나는 물건 사는데 익숙지 않아 사람들은 뭘 사는지 궁금하다. 그녀에게 무엇을 샀는지 물어도 되냐고 하니, 아무개 선생님의 미술 전시회에 다녀왔다며, 그곳에서 이것저것 좀 샀다고 한다.

“어머 그림 그리세요?” 반가움에 목소리가 한껏 올라갔다. 내가 관심을 보이니 그녀도 하루 종일 말 한마디 못해 말 할 사람이 그리웠다는 듯 그림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말할 때는 신바람이 나는 법이다.

때는 이때다 싶어 내가 그린 그림을 내놓으며 연초부터 집중력이 떨어져 몰두해 보려고 그린 것이라고 했다. 이면지에 연필로, 4B연필도 아닌, 스케치해 놓은 것이다. 말이 스케치지 그냥 끄적거려 놓은, 남들은 부끄러워서 그리다가 누구라도 쳐다볼라치면 얼른 감출 그런 것들이다.

기초를 익힌 것도 아니고 신문이나 책에 삽화로 나와 있는 것을 대충 비슷하게 그려 본 것이다. 스무 장 남짓 된다. 창작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있는 그대로 그리는 데도 쉽지 않다. 형체도, 명암도, 분위기도, 표정도 전혀 비슷하지 않고 엉뚱한 그림이 된다. 그런데도 대단한 밑천이라도 되는 듯 차곡차곡 모아 두었던 것들이다.

내 그림을 본 그녀가 누구든지 노력하는 사람을 보면 자기는 많이많이 도와주고 싶다고 했다. 어떻게 그림 그릴 생각을 했냐며 대단한 동지를 만난 것처럼 좋아했다.

매일 신문에 나와 있는 영어를 큰 소리로 읽는데 그 옆에 ‘오늘의 운세’ 난이 있다. 그걸 믿지는 않지만 오늘은 어떨까 재미삼아 읽어보게 된다. 대체로 좋게 나와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한다. 그날은 “배울 것이 더 많아진다”라고 쓰여 있다.

이 나이에 무엇을 더 배우라고 이런 말이 쓰여 있을까. 배울 수만 있다면 좋지. 평소와 다름없이 하루가 지나갈 무렵 그녀가 약을 사러 왔고 그림 이야기가 나왔다. 그녀가 잠깐 집에 다녀오겠다고 하더니 데생 일곱 장을 가지고 왔다. 그것을 복사 놓고 똑같이 그려 보라고 숙제를 냈다.

그림의 제일 기초는 똑같이 그리는 것이다. 그것이 돼야 응용이던 창작이든 할 수 있다. 지우개로 똑같을 때까지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지우고 다시 그리라고 한다. 스케치북이 하도 지워 구멍이 나고 지우개의 똥이 바닥에 수북하게 쌓일 때까지. 그만큼 똑같게 그리는 것이 어렵다.

이미 체험했다. 이십여 장을 그리면서 수 천 번은 아니지만 수 백 번을 지워 가며 그렸지만 똑같은 것 옆에도 못 가봤다. 독학이라 그런가, 기본을 배우면 좀 쉬울까. 시간이 걸리더라도 직접 터득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많이 그려보기로 작전을 세웠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은 집중이 잘되고 시간이 금방 간다. 최고로 집중을 해서 그려도 비대칭이 되고, 원근 표시가 잘 안되고, 선 하나도 반듯하게 그려지지 않아 전혀 다른 그림이 되고 만다. 입체감이 살아나지 않아 구를 그렸는데 원이 된다.

이런 참에 그녀를 만난 것이다. 정말 오늘의 운수가 딱 들어맞는 날이다. 대단한 횡재를 했다고 생각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수 천 번, 수 만 번을 지우면서 좌절하고 아예 포기도 하는데 약사님은 안 그럴 거죠?” 나에 대한 신뢰가 절대 그러지 말라는 끝까지 해 내야한다는 책임감으로 들린다.

그냥 심심풀이로, 집중력이 떨어지는 것이나 막아볼 생각이었는데 판이 너무 커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고마움에 ‘익산수필’ 12호 13호를 줬다. 내 글도 실려 있다는 말과 함께.

요즘은 책도 선뜻 못 준다. 사람들이 책 읽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오죽하면 내 책이 라면 끊여 먹을 때 냄비받침으로나 쓰인다고 하지 않던가. 남이 보기엔 쉬워 보여도 직접 내가 해 보면 쉬운 것이 하나도 없다. 남의 노력에 칭찬이 인색한 세상이다.

그녀도 그런 것을 많이 느꼈기에 내가 그림 그리고 싶어 한다는 것 하나로 이렇게 도와주고 싶은 것이다. 선생님 없이 혼자서 자신만의 기법을 터득하기 까지 수많은 시간과 싸우고 실망하고, 갈등도 많았다고 한다. 그런 시기를 이겨내니 지금은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단다.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 그녀가 지나가다 들렀다며 그린 것 있으면 내놔보란다. 아직 스케치북도 안 샀는데. 배우려는 내가 열정을 보여야 하는데 선생님이 더 열성이다. 어찌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 것 같다.

30여 년 전 테니스 배울 때 생각이 난다. 전화로 레슨 예약을 하고 시간에 맞춰 라켓 하나 덜렁 들고 갔다. 옷은 집에서 입는 차림에 신발도 테니스화가 아닌 단화를 신었었다. 테니스장을 둘러보러 온 줄 알았던 코치가 지금 당장 레슨을 받겠다고 하니 복장은 그렇다 치더라도 신발 때문에 안 된다고 했다.

많은 세월이 흐르고 세상 물정 알 만한 나이도 되었는데 또 이면지에 그냥 연필로 그린 것이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고 예나 지금이나 배우겠다는 기본자세가 되지 않았다.

그녀가 내 글을 잘 읽었다는 핑계로 약국에 들렀다. 나는 지금까지 그림은 손도 못 대고 쳐다보기만 하고 있다. 내 입에서는 어렵겠다는 말만 나온다.

그녀가 네모 여덟 칸을 만들더니 가장 연한 것부터 진한 거까지 명암 대비를 해 보라고 또 숙제를 내고 갔다. 얼른 스케치북도 4B연필도 사고 선생님의 정성에 부응해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