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 사람들 > 포도밭 일기

포도밭 일기

윤복순 윤약국약사

무릎과 발목에 박찬호 크림을 바르고 발목보호대까지 찼다. 일요일 밭에서 일을 하고 온 후유증이다. 포도 줄기가 커 넝쿨손과 곁가지를 따줘야 하는데 높아서 박스를 놓고 올라 내렸더니 무리가 간 모양이다. 일 할 때는 재미있어서 아픈 줄도 몰랐는데.

농번기에는 언제나 일손이 모자라는데 올해는 지방선거까지 겹쳐 더하다. 며칠 전이다. 간신히 외국인 A를 소개받았다. 그녀 숙소까지 가서 데려와야 한다. 그녀가 친구와 같이 자취를 하는데 친구는 다른 집 일을 가고 그녀만 우리 집 일을 온다. 둘이 기다리고 있으니 다른 집 사람이 둘 다 태우고 간 것이다.

우리 집에서 조금 늦게 갔더니 이런 일이 벌어졌다. 소개인에게 전화해 전후 얘기를 하고 그녀를 우리 밭에 데려다 주라고 하니 그 집에서 A를 놓아주지 않는다고 한다. 부지깽이 도움이라도 필요한 이 시기에 숙련된 일꾼 한 명은 가뭄에 물꼬 때문에 이웃끼리 싸움 나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 집 밭까지 가 A를 데려오고야 말았다.

농사일 할 사람이 없어 외국인을 쓴다. 우리 밭에도 상주하는 외국인 두 명이 왔다. 그들은 태국인으로 부부다. 소개인이 저녁때 데리고 왔을 뿐 아니라 그들 숙소가 청소되지 않아 아파트에서 하루 밤을 재웠다.

그들은 한국에 온지 두 달 정도 되었다는데 우리말은 열 단어나 알까 말까다. 영어를 할 줄 아냐고 하니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는다. 영어도 몇 단어 아는 정도다.

말이 통하지 않아 스마트폰에 대고 말을 해야 한다. 번역되어 나오는데 오류가 많아 서로 눈만 쳐다보기도 한다. 일하는 데는 별 지장이 없다. 직접 보여주며 설명하니 알아듣는다.

그들은 37,38세다. 곁순 따는 것은 내가 한 줄 나갈 때 그들은 한 줄 반 나간다. 부부끼리 하니 보기도 좋고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 올 때도 둘이 밭에 남으니 별 걱정 없이 돌아온다.

살림을 못 하는 나지만 나름대로 이것저것 사 보내는데 남편이 보니 무얼 먹는지 그대로 있다고 한다. 그들을 대형마트에 데리고 가서 먹고 싶은 것을 사라고 했다. 돼지고기 닭고기 등 고기종류만 많이 산다. 태국인들이 그렇게 고기 좋아하는 줄 몰랐다.

우리 밭에 일하러 오는 아주머니들은 70대 전후로 열정은 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아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그래서 남편이 애가 타는데 젊은 부부가 왔으니 천군만마를 얻은 격이다. 그들은 몸이 빠를 뿐 아니라 손끝도 야무져 두 번 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말만 알아들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

관리사에는 인터넷을 깔지 않아 와이파이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고향에 애기가 있다고 했다. 친정엄마 아빠가 키운단다. 페이스 톡을 해야 하는데 와이파이가 되지 않으니 울기 직전의 얼굴이다. 먹고 사는 문제보다 그걸 먼저 해결해 줘야 했다.

한 달이 되어 월급도 주고 일도 익혀 여러 말이 필요 없을 만큼 되었다. 그들의 한국어는 영 늘지 않는다. 일 할 때도 부부가 한 조가 되고 일이 끝나면 고국의 식구들과 영상통화를 하고 둘이만 있으니 쉬 배워지지 않는 것 같다. 그래도 불편함이 없는지 항상 웃는 얼굴이었다.

어느 일요일 출근하니 둘 다 말이 없고 니드가 울고 있다. 그녀 엄마가 많이 아프다고 전화가 왔단다. 딸 사위가 외국에 나가 일을 하니 어지간하면 알아서 치료받을 텐데 많이 아픈 모양이다.

그녀의 말 수가 줄어들더니 결국 태국으로 떠났다. 두 달 후에 오겠다며. 포도밭은 알솎기로 눈코 뜰 새 없다. ‘하필 왜 이런 때.’ 아픈 사람 앞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얼마나 내가 이기적인가.

니드가 잘 도착했다고 연락이 왔다. 그녀의 어머니가 잘 치료받고 완쾌되어 그녀가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다. 니드가 가고난 후 칸 혼자 밭에 두고 오려면 짠한 생각이 들어 몇 번씩 뒤를 돌아보게 한다. 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져 가는 것 같다.

마트에서 일꾼들 새참을 사가지고 오는데 남편이 밭의 스프링클러 모터를 끄지 않고 왔다고 한다. 남편은 밭에서 돌아오면 낮에 땀을 많이 흘려 맥주로 갈증을 푼다. 그날도 그랬다. 이럴 때 칸이 한국말이 통한다면 택시타고 밭에 가지 않아도 될 텐데. 남편이 혼자 갔다 오겠다는걸 의리상 같이 갔다. 다행히 모터는 타지 않았다.

밤 11시가 넘었는데 칸이 식구들과 통화를 하는지 관리사에 불이 켜 져있다. 한국말 알아듣지도 못하는데 아빠 퇴근하고 나면 네가 밭도 한 바퀴 둘러보고 모터도 확인 하라고 하니 잘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일요일에 칸은 쉬라고 하고 남편과 둘이서 일을 했다. 쉬라는 말을 못 알아들었는지 저도 따라 나선다. 홀리데이라고 하니 입이 귀에 걸린다. 쉬는 날이라고 해도 어디 여행도 못 가는데 말이다.

점심때가 되어 밥 먹으러 가자고 하니 자고 싶단다. 하기야 나도 젊을 때는 밥보다 잠이 더 좋았다. 오후 새참 때 물먹으러 관리사에 갔더니 잘 만큼 잤는지 빨래를 하고 있다. 니드랑 같이 할 때는 젊은이들의 낭만으로 보이더니 칸 혼자 하니 외로움이 묻어있다.

니드의 엄마는 많이 나았냐고 물으니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인다. 니드는 언제 오냐고 물은 줄 아는 모양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부부가 같이 하면 재미있는 법인데 칸이 안쓰럽다. 곧 니드가 돌아올 테니 밥이랑 잘 챙겨 먹고, 이발도 하러 가자고 했다. 그녀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단다.

집에 오면서 남편에게 칸이 혼자라 안 돼 보인다고 하니 “당신 남편이나 잘 챙기세요” 하며 질투를 한다.

포도밭은 더 많은 일손을 필요로 하는데 발목과 무릎은 아직 차도가 없다. 주중에 다 나아야 일요일 또 밭에 가 신나게 일을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