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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윤복순 윤약국약사

연초에 올 해 선물이라며 남편이 주식으로 돈을 벌어 중남미여행을 시켜주겠다고 했다. 포도농사 지어서라면 몰라도 주식이라니? 그게 어디 1~2백 만 원으로 되는 줄 아는지, 최하로 한 달 이상은 걸릴 텐데, 가당치도 않아 한 귀로 듣고 흘려버렸다.

남편이 얼마 되지 않는 용돈을 모으고 모아 주식을 샀던 모양이다. 동전주로 주당 가격이 몇 백 원에서 1~2000원 짜리다. 오르면 얼마나 오르고 내리면 또 얼마나 내리겠는가. 종기가 커야 고름도 많이 나오는 법이다. 그런데도 남편은 매일매일 일희일비 한다.

포도농사는 겨울에 특별히 할 일이 없다. 농한기에 배우라고 색소폰을 사 줬는데 며칠 학원을 다니더니 때려치우고는 아예 색소폰을 농 위에 올려놓았다. 뭐라도 소일거리가 있어야 하는데.

내가 출근하고 나면 남편이 혼자서 주식 공부를 했나보다. 통계를 내고 그 회사에 대한 역사를 읽고 실적을 분석하고 인간관계 등을 들여다보며 몇 년 동안 공을 들여 대여섯 종목을 샀단다. 조금만 오르면 자랑 들어주느라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설날에 애들이랑 다 모여 목표한 일 잘 이루고 건강 하라며 덕담을 나눌 때다. 남편이 남미여행이 올해 계획이라며 주식 얘기를 꺼냈다. 잘 해서 그 돈으로 여행을 가야겠지만 만약 모자라면 아들딸이 보태줘야 하고, 더 많이 벌었을 때는 애들에게 선물을 사다 주겠다고 하는 것이다.

딸이 “애를 다섯이나 키우는데 나도 찬조해야 돼?” 해, 농담반 진담반이 되었다. 종자돈이 얼마나 된다고, 애들도 나도 그런 재미라도 그런 희망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정도로 들었다.

이미 포도밭일은 시작되었다. 평소보다 일찍 밭에서 돌아온 남편이 “오늘 같이만 오르면 남미 갈 수 있겠다.”며 세상 돈을 다 쥔 것 마냥 기분이 최고조였다. 괜찮은 종목을 하나 골랐는지 아무개가 효자가 되겠다며 나보고도 컴퓨터에 한 번 들어가 보란다.

나는 주식의 주자도 모르고 주식에 대해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 투자가 아니라 투기라는 선입견이 있다. 가끔 뉴스에서 개미투자자가 전 재산을 날리고 극단의 일을 저질렀다는 글을 읽었기 때문이다.

한 달 전쯤이다. 아들이 한참 뜸을 들이더니 “엄마 아빠한테 기쁨조 하는 사람이 있어요?” 하고 물었다. 자기 부모도 잘 모시지 못하는 판국인데 누가 나에게 아니 남편에게 까지 기쁨을 주겠는가. 너희들이 엄마 아빠에겐 기쁨조고, 느네들이 무탈하게 사는 것이 엄마 아빠의 행복이라고 말해줬다.

“요즘 아빠 엄마가 효자 하나 키우고 있다.” 남편이 문자를 보냈더란다. 주식이 올랐다고 해도 내가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 애들에게 이렇게 자랑을 한 모양이다.

딸은 바로 “고 녀석의 효도가 계속 이어지길 바래요. 상한가 쳤나요?” 이런 문자를 보내왔다. 몇 푼의 주식으로 온 식구가 이 만큼 재미이었으면 효자 노릇은 톡톡히 한 것 같다.

바둑 배울 때 천정에 바둑판이 그려지듯 아들딸이 반응을 보이니 남편의 주식공부는 탄력을 받는다. TV도 그것만 보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시간도 많아졌다. 내 앞에서 전문용어를 써가면서 폼을 잡기도 한다. 이러다 당신도 전문가 되겠다고 띄워주면 효자 한 종목만으로도 남미여행을 갈 수 있을 테니 두고 보라고 허세를 부린다. 어림도 없는 돈인데도 들떠있는 그 모습이 철부지 같아 귀엽다. 언제 이런 젊은이 같은 기백을 보겠는가.

며칠 전 내 생일이라서 식구들이 다 모였다. 며느리가 “지금 보시지 말고 저희들 다 올라가면 보세요.” 하며 봉투를 내가 보던 책속에 찔러 넣어 주었다. 외손주들이랑 북새통의 1박2일이 지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남편과 나만 남았다. 무슨 편지일까 설레는 마음으로 봉투를 열어 보았다.

상상하지 못한 돈이 들어있다. “아버님 어머님, 남미여행 당연히 저희들이 보내드려야 하는데 아직은 저희들이 기반을 잡지 못했어요. 미약하지만 보태 쓰셨으면 좋겠습니다.” 며느리의 마음이 가득 담긴 손편지다.

만만한 게 남편이라서 “왜 주식 이야기는 해 가지고, 무슨 효자 문자는 보내가지고 애들에게 부담을 주냐.” 고 잡도리를 했다. 남편은 당장 돌려주라고 도리어 나한테 야단이다. 그 돈을 받았다고 나보고 돈 욕심이 많단다.

즈네들이 무슨 돈이 있다고,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다고 이리 큰돈을 준단 말인가. 바로 줄 수는 없고 무슨 명분이 생기면 돌려줘야겠다.

요 며칠 주식이 빠지는지 기가 죽었다. 가만 보니 내린 날은 말이 없고 오른 날만 자랑을 한 것이다. 자랑만 들어서 돈을 많이 번 줄 알았는데 효자종목 하나만 많이 오르고 다른 종목들은 현상 유지이거나 오히려 내려 전체적으로는 플러스를 조금 낸 상태다.

차라리 한 푼 한 푼 따복따복 모으는 게 낫겠다고 하니 내린 A종목은 바닥을 쳤기 때문에 두 배까지는 오를 거라며 또 기세 등등이다. 어차피 여행은 겨울에 갈 것이니 그때까지 두고 보란다.

우리 나이에 무엇으로 매일매일 일희일비 할 수 있겠는가. 남미여행이라는 큰 희망도 있으니 주식이 효자는 효자다. 치매예방에도 좋겠다며 남편 기분을 띄워주었다.

한 수 더 떠 꿈은 이루어진다고 했으니 남미여행도 갈 수 있다고 바람을 넣는다. 아침마다 ‘효자 파이팅’을 외치며 하이파이브를 날리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웃을 거리 없는 초로의 부부만이 사는 집안 풍경이다.

효도의 끝은 입신하는 거라는데 효자주식이 남미여행 시켜줬으면 좋겠다. 어느새 나도 남편 닮아가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