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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대회

윤복순 윤약국약사

가끔은 마음이 늙는다는 것을 느낀다. 세상풍파를 겪으면서 말랑말랑했던 감정이 딱딱해져 웬 만한 일에는 그저 ‘그렇군’ 하는 정도의 반응 밖에 나오지 않을 때가 있다. 낙엽이 구르는 것만 봐도 하늘에 흩어져있는 구름만 봐도 느끼던 감흥은 이제 책갈피에 꽂혀 책장 속에 갇혀있고, 낡은 사진첩 속에서나 존재하는 추억이 된 것일까.

아침에 일어나니 햇빛이 쨍 나고 구름 한 점 없다. 바람까지 상쾌해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다. 제 1회 호남 약사 약업인 체육대회가 있는 날이다. 나는 이미 원로회원으로 선수도 아니고 임원도 아니다. 참가해야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데도 기꺼운 마음으로 참석하기로 했다.

요즘은 농번기라서 일요일에는 포도밭으로 일을 하러 간다. 농사일 이라는 게 해도 해도 끝이 없다. 풀 뽑기만 해도 끝냈는가 하면 처음 시작했던 곳은 어느새 또 풀밭이다. 이렇게 일요일의 농부가 된지 세 달 째다.

하루쯤 일탈이 필요했고, 후배와 같이 가는 일이 좋아 참여하는 길이다. 후배는 나이듦을 한방에 날려준다. 맑은 웃음소리로, 생각도 못했던 독창적인 해석으로 나의 무디어진 감각을 깨워준다. 안주하려던 직업의식이 그들의 도전을 보면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5월의 신록으로 후배들의 함성으로 재충전을 하고 또 그들이 인생을 즐기는 방법을 배우러 간다. 그래서 오늘은 선물이다.

광주 실내체육관에 도착하니 이미 전남 광주 회원들은 도착해 있다. 이곳은 광주 하계 유니버시아드대회를 위해 새로 지은 체육관으로 깨끗하고 시설도 좋다. 우리가 처음으로 사용한단다.

어느 회장님은 이번을 계기로 이 대회가 100년 이상 이어지기를 기원했고 광주 회장님은 즐겁고 행복하길 바란다고 했다. 나도 젊은 기를 받아 즐겁고 행복하도록 응원 열심히 하기로 마음먹었다.

배구 족구 배드민턴 피구 이어달리기 줄다리기 장기자랑 응원전 등 종목도 다양했지만 나는 어느 하나 잘 하는 것이 없다. 탁구가 있다면 한 번 해 볼 수도 있는데.

첫 번째 게임은 배구다. 대학 1학년 때 체육대회날, 너나나나 서브를 넣지 못해 상대방의 점수가 올라가는 그런 게임을 했다. 여학생이 몇 명 되지 않아 잘하고 못하고도 없이 우리 과 여학생은 모두 선수였다. 상대팀의 선수가 강서브를 넣어 우리팀을 기죽이자 남학생들이 “목탁과 목탁과 똑똑” 혀로 목탁소리를 내며 상대방의 비위를 거스르는 응원을 했던 생각이 나 실없이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오늘의 경기는 랠리가 한없이 이어져 마치 프로팀 경기를 보는 것 같다.

배구와 마찬가지로 족구를 할 때도 목이 터져라 응원을 했더니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목이 쉬어 바로 나이 먹었음을 인정해야했다. 각 팀의 실력이 막상막하여서 5세트까지 진행되다 보니 점심시간을 훌쩍 넘겼다. 결국 결승전은 점심후로 연기 되었다.

중간 점수는 전북팀이 1위로 2등과 격차가 꽤 났다. 배드민턴에서 꼴등을 하는 바람에 아슬아슬하게 1위를 지켰다. 장기자랑이 이어지고 모든 경기가 풀세트까지 가다보니 피구와 이어달리기는 생략되었다.

마지막 한 경기 줄다리기만 남았다. 한 팀당 남자 10명 여자 5명이란다. 점수도 제일 많아 이번 경기에서 순위가 바뀔 수 있다. 어느 팀이든 1등이 가능한 점수 차이다.

나는 자진해서 선수로 뛰겠다고 했다. 몸무게가 많이 나가 뒤에서 딱 버텨준다면 날씬한 후배 둘 몫은 될 것 같았다. 연초부터 어깨가 좋지 않아 무리하면 안 되는데도 다시 치료를 받는 한이 있더라도 선수로 뛰고 싶었다.

있는 힘을 다해 버텼다. 응원하는 사람들이 더 열성이었다. 마치 자기들이 선수인양 선수와 똑같이 힘을 쓰고 똑같은 자세를 취했다. 결국 한 게임이 무효화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응원전이 과열되자 응원단은 5m이상 떨어지라는 경고까지 받았다. 우리 팀은 3승 전승으로 1위를 했다. 줄다리기에서 1위를 함으로써 종합우승을 굳혔고 우승컵도 받았다.

오랜만에 힘을 썼고 하나 됨도 맛보았다.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팔이 덜덜 떨렸지만 나이 먹었어도 한 몫 했다고 생각하니 재미있고 기분 좋고 행복했다.

우리 회장님이 오늘의 우승은 여약사님들 덕분이라며 우승컵에 맥주를 부어 주며 여약사들만 마시라고 했다. 남자들은 소주나 먹겠단다. 나는 술을 못 한다. 그런 내가 메이저대회에서 그랜드슬램을 이룩한 박세리라도 된 마냥 우승컵을 양손으로 잡고 벌컥 한 모금을 마셨다. 이 기분! 요새 애들 말로 한다면 죽여준다. 우승컵을 안아 본 것은 평생 처음이다.

시간은 흐른다. 맥없이 가는 것 같아, 언제 내가 이런 것 해보겠냐 싶어 줄다리기를 했는데 열정은 남은 시간에 반비례하는지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인 사람은 나밖에 없다.

개인주의가 만연하는 요즘 단체운동으로 소속감과 협동과 조화와 단결의 위대함을 배웠다. 일요일 체육대회로 한결 젊어지고 후배들과 일체감도 맛보고 우승컵을 안아보는 성취감도 얻었다.

얼마동안 ‘그렇군’ 하는 반응만 보이지는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