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복순 윤약국약사

시간이 될 때마다 일본어 책을 큰소리로 읽는다. 일본 글자를 알아서가 아니라 음이 달아 있는 것을 외우는 것이다. 요즘 공부법으로 말하자면 통 문장 외우기다.

어릴 때 책의 그림만 보고 문장을 달달 외웠다. 앞뒤를 가리고 한 문장만 앍으라고 하면 읽지 못했다. 물론 단어도 띄어 놓으면 못 읽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단어 중에 한 글자만 아는 자가 있어도 대강 맞춰 읽어졌다. 다시 그 단어에 나왔던 글자가 여기에도 나오네 하면서 글이 익혀졌다.

기역니은부터 배우지 않았다.

우리글로 된 문장을 읽으면 일본어로 바로바로 나왔다. 왕초보 일본어 책에 나오는 문장만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음을 가리고 일본 글을 읽어볼까.

떠듬떠듬 읽어졌다. 히라가나부터 쓰면서 외우지 않았는데 말이다. 이런 신통방통할 때가 있나.

그런데 원래대로 발음되지 않는 것들이 나온다.

여기서 문법을 알아야 될 것 같다. 예를 들어 ‘하’가 조사로 쓰일 때는 ‘와’로 읽힌다든가.

어느 것은 사이시옷이 되기도 하고, 장음으로 발음하기도 하고, 디귿 받침으로 되기도 하고, 탁음 반탁음 등등으로 음이 달려있지 않으면 속수무책이다.

공부든 운동이든 조금 알 때는 나 잘 아네 하고 아는 체를 하고 싶다.

새 책 보고 싶은 마음이 자꾸 생긴다. 벌써 2단계 들어갔다고 뻐기고 싶어서 그럴까. 원칙 아니 동사의 규칙 같은 것도 모르면서 말이다.

어릴 때 겉 넘어가지고 날개도 안 난 것이 날려고만 한다는 말을 들었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L언니가 일본어 책을 큰 소리로 읽고 있는데 들어왔다. “무슨 책을 소리 내어 읽어?” 일본어를 독학하고 있는 중이라고 하니 호기심을 보인다.

내 책의 저자와 출판사를 적어 주었다. 똑같은 책이 없다. 하기야 15~6년 전에 산 책이다.

골프에서도 90타 치는 골퍼는 남에게 못 가르쳐서 안달이라고 상식 수준인 내 일본어에 관한 공부 방식을 꽤 늘어놓았다.

그녀는 나보다 여덟 살 많아 칠십 대 중반이다. 나를 많이 좋아한다. 같은 얘깃거리가 있어야 자주 만날 수 있고 말이 통한다고 꼭 배워야겠단다.

뜻이 있으면 길은 있게 마련이다. 전주 여성회관에서 일본어 강좌가 있다고 문자가 왔단다. 초보부터 시작이라 마침 잘 됐다고 나한테 자랑을 한다.

같이 다니자는 뜻인데, 익산도 아니고 전주까지 평일이라서 시간 내기가 곤란하다고, 무엇보다 한 번 시작한 독학 내 방식대로 해 보고 싶다고, 왕초보는 조금 면했다고, 또 몇 문장을 술술 외면서 잘난 체를 했다.

그녀가 강의 갔다 오다 약국에 들렀다. 교재를 보니 내 책 보다 훨씬 어렵다. 그럭저럭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여러 번 봐 익숙해서, 이미 외웠던 것이라서 대충 맞춰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확실하게 아는 것이 아니니 그 책에선 읽어지지 않았다. 쌀에 뉘처럼 어쩌다 아는 단어가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좀 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절벽이다.

나름대로 하루에 한 시간씩 6개월 정도 한 공부인데 지금도 왕초보라니. 히라가나부터 한 자 한 자 쓰면서 철자를 외우기로 했다. 글씨인가 그림인가 영 써지지 않는다. 내가 써 놓고도 무엇을 썼는지 그렸는지 읽을 수가 없다. 의기소침이다.

L언니가 상기된 얼굴로 왔다. 일본 갔다 와서 쓴 ‘론짱’이란 글을 복사해 달란다.

“왜?”

“전북 회장님이 그 글을 일본어 선생님에게 번역해 달라고 부탁했어. 그래서 한 문단씩 일본어로 바꾸어 보는 공부를 하거든.”

한일친선여성협회 초도이사회 때 나 보고 일본 갔다 온 얘기를 하라고 해서 글로 써서 읽었다. 회의록에 첨부한다고 하더니, 일본어로 번역해 일본 회장에게 e-mail로 보낸다고 하더니 회장님도 같은 선생님 강의를 듣는 모양이다.

내 글이 일본어로 번역된다는 말에 용기 내어 다시 일본어 책을 폈다. 그림인지 글씨인지 모를 글을 다시 써 본다. 몇 번쯤 쓰면 히라가나의 모양이 나올까. 음이 달려 있는 책으로 공부를 하면 처음에는 쉽지만 실력이 늘지 않는다고 하더니 그 말이 맞는 걸까. 여행 가서 간단히 말만 할 줄 알면 됐지 뭐 쓰고 읽을 일 있겠느냐는 생각으로 음이 달아 있는 것으로 시작했다.

K는 왜 우리라고 고급 일본어를 못 할 거라고 미리부터 단정하냐고 야단이다. 첫 단추부터 차근차근 정석대로 배우라고 한다. L이 선생님이 가르쳐 주는 대로 하려니 혀가 돌아가지도 않고,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하겠다며 내 책으로 배우는 게 쉽겠다고 한다.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이 독학보다는 쉬울 텐데. “언니, 몇 시간이나 배웠다고 벌써 잘 하기를 바래요.” 언니한테 한 말인데 왜 내 가슴이 따끔하지. 공부에 비법이 어디 있겠는가. “반드시 먼저 백 번을 읽으라. 글을 백 번 읽으면 뜻이 저절로 나타난다.”(讀書百遍而義自見)라는 말이 그때 바로 떠올랐다.

80타 치는 골퍼는 먼저 물어봐야 가르쳐주고, 70타는 사정하며 물어봐야 겨우 가르쳐주고, 프로골퍼는 물어보면 돈 받고 알려준다고 한다. 내가 얼마나 L언니 앞에서 아는 체를 했으면 내 책으로 배우는 것이 더 쉽겠다고 말할까.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고 어릴 때부터 날개도 안 난 것이 날려고만 하더니 이 나이에도 변한 것이 없다. 다시 큰 소리로 일본어 책을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