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복순 윤약국약사

일요일 밭에 가서 일을 하고 왔더니 바로 감기가 재통 했다. 언제부터 체력이 이렇게 저질이 됐는지 모르겠다. 많이 회복되어 다 나은 줄 알았는데 감기의 발톱이 온몸에 도사리고 있어 호시탐탐 공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가 보다.

2월 안으로 포도 전지를 해주어야 한다. 설 명절이 있고 월말에는 여행이 계획돼 있어 시간이 없다. 날씨는 몇 년 만의 추위로 연일 최강한파라고 한다. 일요일도 최고기온이 영하 5도였다. 포도밭은 반 하우스라서 춥지는 않다.

익산엔 눈이 내리지 않았는데 호남 서해안에 눈이 내린다고 하더니 밭에는 눈이 쌓였다. 햇빛이 좋았기에 어지간하면 바로 녹을 텐데 영하의 날씨라서 쉬 녹지 않았다. 쌓인 눈 때문에 햇빛이 하우스 안으로 들어오지 않아 약간 쌀쌀했다.

일을 하면 춥지 않다. 나는 일을 열심히 하는 편이다. 게으름을 피우거나 얼렁뚱땅 하는 것은 내 스스로 용납이 되지 않아, 무엇이든 하기로 맘먹은 것이면 신앙처럼 한다. 오늘 할 일은 남편이 포도가지를 자를 수 있도록 묶여 있는 가지를 풀어놓는 일이다.

한 달여를 감기로 고생한다. 아침운동도 나가지 못한다. 퇴근하면 홍삼에 꿀을 타 마시고 출근하면 고 함량 비타민으로 체력회복 및 면역력 증강을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도 감기가 뚝 떨어지지 않는다. 괜히 경로우대의 나이가 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갱년기 때 갱년기 증상이 하루에도 몇 번씩 나타나기도 했다. 또 며칠 동안 잠잠하기도 했다. 좋아졌다는 생각이 들 때 불쑥 나타나 괴롭혔다. 이런 기간을 일 년여 겪으며 청년에서 중년이 되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갱년기 후에도 체력이나 감정에 변화가 없다고 나에게 아무리 최면을 걸어도 어느새 중년이 되어 있었다.

감기를 앓고 운동도 못하고 햇볕이 한없이 좋은 일요일 한 나절도 그냥저냥 집에서 보내면서 나는 안달이 났다. 이렇게 살아도 되나, 시간을 헛되이 보내서 어떻게 하나, 계획 세웠던 일들이 며칠씩 미루어져도 되나. 많이 나태해지고 막 사는 것 같아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일요일 포도밭에 일하러 가지 않는다고 뉘가 뭐랄 사람도 없는데 내가 먼저 서둘렀다. 감기는 다 나았음을, 하루 종일 일을 해도 끄떡없음을 얼른 확인해 보고 싶었다. 아침나절 약간 춥다는 느낌이 있었지만 일을 하다 보니 바로 체온유지가 되었고 일도 속도가 붙어 전혀 녹 쓸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그까짓 감기로 내가 많이 쫄았음에 비웃음을 날렸다.

건강 이상 없음을 자축하며 짜장면 한 그릇을 게 눈 감추듯 먹었다. 신바람이 났다. 입맛을 잃었었는데 예전 입맛이 돌아온 것이다. 감기에서 탈출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점심식사 후 여세를 몰아 손놀림을 빨리했다. 진도 나가는 재미에 일 속에 푹 빠졌다. 저녁때가 되면서 바람이 일었다. 나가던 줄은 다 끝내고 가야한다고 우겨 하던 칸은 다 마쳤다. 그 사이 몸에 바람이 들었나 보다.

집에 오려고 차에 올랐을 때 마구 떨리기 시작하더니 나도 모르게 끙끙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마치 갱년기 때 조금 증상이 완화 된 것을 다 없어졌다고 착각했듯이, 오랜만에 밖에 나와 기분전환 된 것을 감기 완치라고 경로우대증 받는 나이와는 무관하다고 또 객기를 부린 것이다. 아이구 이놈의 오버.

음성이 변하고 머리가 무겁다. 낮의 자신만만함은 어디로 가고 지난 번 독감의 공포가 밀려왔다. 중환자라도 된 듯 이것저것 챙겨먹고 몸을 뉘었다. 자투리 시간이 나면 해야 할 것 없나 일을 만들곤 했는데 언제부턴가 ‘아니야 몸 좀 쉬어줘야 돼’ 이런 말이 튀어나오곤 한다.

아마 65세가 되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괜히 지하철 공짜로 타는 나이가 아니다. 겉으론 변화가 없는 것 같지만 갱년기를 거치며 중년이 되었듯이, 경로우대가 되면서 중년에서 노년이 되어간다. 65세가 되어가는 이 시기가 제2의 갱년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애기들은 앓고 나면 약아지고 새로운 것을 하게 되고 노인은 앓고 나면 늙는다고 한다. 나도 이번 감기로 얼굴의 탄력이 없어져 다섯 살은 더 먹어 보인다. 자신감은 그보다 훨씬 더 떨어져 다음 일요일은 무조건 쉬어야겠다, 로 정해 놨다.

갱년기 증상은 시간이 지나면서 강도도 약해지고 띄엄띄엄 나타났다. 몸도 어느 사이 그 증상에 조금씩 적응되어 갔다. 체력이 예년만 못하다 하면서도 나름대로 건강한 중년이 되었고, 월화수목금금금 으로 지금까지 이어졌다. 계속된 혹사에 몸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 반란이 왜 경로우대의 나이에 일어났을까.

고무장갑 없이 집안일을 한다. 갑갑해서 못 낀다. 따뜻한 물을 사용하는데 쌀을 씻을 때는 찬물을 쓴다. 그러면 또 어느새 콧물이 난다. 여태까지 괜찮았는데 감기 뒤로 이러니 화가 나고 정말 나이를 먹긴 먹었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렇지만 크게 걱정하진 않는다. 겨울에서 바로 봄이 오지 않고 몇 번의 추위가 왔다 갔다 하다 와야 환절기를 맞는 몸의 충격이 크지 않다. 일 년 여간 갱년기를 겪으며 밀고 당기는 협상을 거친 뒤 건강한 중년이 되었다. 노년기 맞을 준비를 하라고 감기를 오랫동안 앓는 것 같다. 나은 듯 하다 재발하고 조그만 변화에도 바로 신호를 보내 긴장하게 한다. 이렇게 감기의 나고 듦이 건강하고 지혜로운 노년을 준비하는 적응 기간이라고 생각한다.

탄탄대로의 노년을 만들어 주려고 긴 감기와 싸우고 있는 제2의 갱년기 파이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