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숲교회 담임목사 
강 남 웅

신약성서에는 시간을 뜻하는 두 개의 단어가 분명하게 구별되어 사용된다. 흘러가는 시간을 뜻하는 '크로노스'(Chronos)와 의미 있는 시간을 말하는 '카이로스'(Kairos)이다. 크로노스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하루, 24시간, 1440분, 86,400초로 주어지는 시간이다. 23.5도가 기울어진 지구의 자전과 공전으로 밤낮이 찾아오고 계절이 찾아오는 시간, 남자들이 군대에 가서 “거꾸로 매달아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라고 말했던 시간이다. 반면에 카이로스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 오늘에 충실하자)’이란 표현처럼 살아지는 시간이 아니라 살아가는 시간을 뜻한다. 기회를 잡고 의미를 부여하는 질적인 시간을 말한다. 이렇게 성경의 시간 개념은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크로노스와,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 속에 개입하는 특별한 때로서의 카이로스가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 한반도에서 펼쳐지고 있는 일련의 국제 정치적 변화의 움직임들은 카이로스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왜 그럴까? 우리가 주지하듯이 한반도를 축으로 하는 국제정치 양상은 한국·미국·일본과 북한·중국·러시아가 양대 산맥을 이루어 마치 마주 달리는 열차가 끊임없이 힘 대결을 펼치는 그런 형국이었다. 더욱이 최근 수년간 북한이 핵 무력을 완성해가는 과정 동안 한반도에서의 전쟁 발발 가능성은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높아진 상황이었다. 그런데 2018년 들어 상황이 급반전되어 남북정상의 극적인 만남이 이루어져 판문점 선언이 발표되었고, 이제 북미 정상이 서로 마주앉는 세기적 사건을 목전에 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지금 세계를 주목시키고 요동시키는 강력한 키워드는 ‘한반도 평화’이다. 이러한 한반도에서의 화해와 평화를 향한 큰 발걸음을 시기적으로 하나하나 따져보면, 마치 톱니바퀴처럼 맞아 떨어지는 기회의 시간임이 분명해진다.

첫째, 북한에서 최근 성장하고 있는 소위 장마당이라 불리는 민간 경제부문의 활성화가 미국 주도의 강력한 국제제재로 인해 상당한 압박을 받고 있으며, 체제붕괴의 위협으로 대화에 나서게 된 점을 꼽을 수 있다. 둘째, 미국 대통령 트럼프가 국내 정치에서 수세에 몰리고 있는 중이며 중간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의 탈출구를 북한의 핵 문제 해결 및 관계정상화에서 찾으려 한다는 점이다. 셋째, 실향민 가정 출신인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과의 관계 개선 및 한반도 평화에 대해 지대한 소명감과 진정성을 갖고 있으며 온유한 성품으로 김 정은과 트럼프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넷째, 중국이 누적된 대 미국 무역 흑자 문제로 인한 무역 전쟁 중이어서 이전처럼 적극적으로 북한 편에 서서 한반도 문제에 개입할 여지가 상당히 축소되었다는 점이다. 다섯째, 지분과 영향력이 축소된 한국의 보수-극우 세력과 일본 극우 정치 세력이 개입할 여지가 과거에 비해 현저히 줄어들었고 악화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이 같은 요소들이 화학적으로 결합하여 일어난 한반도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움직임들은, 하나님이 역사에 섭리하여 이끌어 가시는 때, 카이로스의 시간이라고 믿는다.

지방선거가 20여일 앞으로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선거에 대한 관심과 바람이 전혀 불지 않고 있다. 한국과 북한, 북한과 미국도 서로 마주 앉아 심도 있는 대화를 하는 마당에, 유독 국회로 상징되는 한국 정치권만 서로 말이 안 통하는 답답한 수준과 현실을 보임으로, 정치에 대한 혐오와 불신을 초래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통상 '정권 심판'의 성격을 지녔던 과거 지방선거의 분위기 또한 찾기 어렵다. 소위 드루킹 사건을 통한 야당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국민 대다수는 현 정부에 대해 압도적 지지를 보내고 있다. 야당의 무리한 주장에 대한 반감과 함께, 현 정권을 국민이 거리와 광장에서 직접 창출해냈다는, 일종의 책임감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현 정부의 평화 의지를 굳건히 뒷받침해서 이 땅에 전쟁 위협을 종식시키고 다시는 냉전 수구 세력이 권력을 잡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일종의 시대적 흐름을 인식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영화 <관상>은, 얼굴상을 통해 사람의 운명과 인생을 잘 알아맞히던 송 강호가 세조 역을 맡은 이 정재의 왕위 등극을 막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지만 결국 실패한다는 내용이다. 영화의 말미에 물끄러미 바다를 바라보던 그는 이런 명대사를 내뱉는다. "파도가 일렁이는 것만 바라보느라 정작 바람이 어디서부터 불어오는지를 놓쳤다." 지금 동아시아의 질서를 뒤바꿀 큰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하늘로부터 불어오는 화해와 평화의 바람이라고 믿는다. 지금이 카이로스의 시간이다. 파도가 요동치겠지만 그럼에도 바람의 방향을 바꿀 수는 없다. 성서의 말씀처럼 "그분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이며, 동시에 그 뜻을 이루려는 열심과 의지를 가진 자들이 역사의 참 일꾼으로 세워질 것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