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복순 윤약국약사

관측 사상 최고로 더웠다는 올 여름을 견디어 내고 포도가 익었다. 남편이 포도 몇 상자를 만들어 왔다. 포도를 보는 순간 목이 턱 메었다. 이것은 포도가 아니라 남편의 피였다. 폭염과 열대야에 누군들 지치지 않았을까마는 땡볕아래서 그것도 반 하우스 안에서 일하는 것은 피를 태우는 것이다.

일요일이면 나도 밭에 갔었는데 올 여름엔 5주 동안 한 번도 밭에 가지 않았다. 이 더위에 얼씬대다는 죽을 수도 있다고 판단한 남편이 꼼짝 말고 집에만 있으라고 해서 죽은 듯이 집에 있었다. 그래서 포도가 이 만큼 익은 줄도 몰랐다.

얼마나 날이 더웠는지 포도나무에서 저절로 건포도가 되어가는 것이 있다. 수리시설이 되어 있어 때맞춰 물을 주었어도 포도 알이 예년에 비해 작고 무게도 100g 이상 덜 나간다. 사람이나 식물이나 다 마찬가지다. 폭염과 열대야, 가뭄으로 스트레스를 받아 애가 타서 건포도가 되고 알도 키우지 못한 것이다.

첫물은 팔지 않고 평소 고마운 사람들께 한 상자씩 보내준다. 여기저기 전화를 해서 우리 포도가 나왔다고, 먼저 드리고 싶다고, 약국으로 나오시라고 한다. 더러는 집으로 보내주기도 한다.

올 해도 농사를 잘 지었다고, 이 더위에 애썼다고, 싱싱하니 맛있다고 칭찬을 해 주신다. 어깨가 으쓱해진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좋다고 포도 보낸다고 전화를 하는데 마음이 흐뭇하다. 줄 수 있어서 행복하다.

매일 저녁 남편이 퇴근하면서 포도를 가지고 온다. 내일 저녁 때쯤이면 다 팔리고 없다. 남편 퇴근 시간에 맞춰 오라고 예약을 받는다. 예약 물량까지 감안해 가지고 와도 다음날 오후가 되면 또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선불을 주며 자기 것은 꼭 남겨놔야 한다고 부탁을 한다.

포도농사를 10년 넘게 하다 보니 단골도 많아 수확 철이 되기 전부터 전화가 온다. 맛있는 왕포도 며칠부터 먹을 수 있냐고. 나도 포도가 나오면 연락을 한다. 신나는 포도장사가 이렇게 시작된다.

추석명절을 앞두고는 약국이 아니라 포도가게가 된다. 한 사람이 20~30 박스씩 주문을 하고 나는 그 숫자 맞추기에 정신이 없다. 그 물량이 3~4일 정도는 매일 100박스가 넘는다. 내 계좌번호 불러주랴, 돈 받으랴, 포도 실어주랴, 약 팔랴, 농장에 전화해 빨리 물건 보내라고 독촉하랴, 그야말로 팔딱팔딱 살아있는 맛이 난다.

평상시 약국 안에 포도를 놓는다. 뭘 모르는 사람들은 약국 밖에 내 놓고 한 상자에 얼마라고 써 붙이고 팔아야지, 안에 놓으면 어떻게 알고 사가겠냐고 훈수를 해주기도 한다. 약국 안에 놔도 아는 사람이 사가고 또 그 사람이 소문을 내 잘 팔린다.

70세쯤 되어 보이는 아주머니가 이 포도는 어디서 갔다 파냐고 묻는다. 치과에 들렀다 오신 분인데 약국에는 처음이다. 이 양반 참 대단한 사람이다. 어떻게 이렇게 농사를 잘 지었냐며 성격을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당신도 농사를 지어봐서 다 안단다. 마치 당신이 지은 듯 기분 좋아 한다.

어떤 이는 우리가 농사지은 거라고 하면 웃고 간다. 맨날 약국에만 있는데 언제 지었다고 거짓말을 하냐며 비웃는 웃음일 때도 있다. 남편이 퇴직하고 농사 한 번 제대로 지어보겠다고 50줄에 다시 농대까지 다녔다고 장황한 그간의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무엇이든 인연이 닿아야만 만날 수 있다. 나도 살아보니 맛 좋은 과일이나 음식, 맛있는 식당 등 만나기가 그리 쉽지 않다. 여행길에 길가에서 산 과일이 기대이상의 맛일 때 횡재한 것 같아 참 행복하다.

남편은 성실하다. 자신을 위해 돈 쓸 줄도 모른다. 일만 좋아한다. 물론 나도 일 좋아한다. 봄에 포도 순이 나올 때 생명의 환희를 느낀다. 그 순이 하루가 다르게 잎을 키우고 색도 키운다. 직접 키워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설명을 해도 기른 애정과 관심 없기에 기분을 모른다.

한 여름 포도 줄기를 세워 양 옆으로 V 형을 만들고 곁순과 넝쿨손을 따주면 어느 일등 부대의 사열이 이만큼 질서정연하고 멋질까. 받들어총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나는 사단장이라도 된 듯 어깨를 쫙 펴고 그 곁을 걷는다. 이런 맛에 일을 한다. 하루 종일 일을 해도 아픈 줄도 모른다.

늦여름 주렁주렁 달린 포도를 바라보는 맛은 온 세상이 나의 것인 양 배가 부르다. 끝이 보이지 않는 포도나무 밑으로 죽 달려있는 포도송이들, 이 풍요의 기쁨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힘들었던 일들이 봄눈 녹듯 사라진다. 힐링이 된다. 이것이 농사짓는 맛이다.

판매를 시작하면 매일매일 돈이 들어온다. 돈 버는 재미에 신바람이 난다. 밭으로 직접 사러 온 사람들에게 판 돈을 남편이 이주머니 저주머니에서 꺼내 내게 준다. 남편은 이 맛이 좋다고 한다. 땀 흘려서 번 돈을 아내에게 매일 주는 맛, 꽤 괜찮을 것 같다.

연금은 통장으로 나오고, 통장은 내가 가지고 있고, 어지간한 것은 신용카드로 다 쓰니 현금 만질 일이 별로 없다. 봄부터 농사짓느라 돈 많이 들어갔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한테 돈을 타간다. 출하 철이 되면 그 돈을 줄 수 있으니 남편의 기분이 좋은 듯하다.

농사지어봐야 간장 된장 값도 안 나온다고 한다. 인건비 비싸고 퇴비부터 이런저런 자재비도 만만치 않으니 이것저것 제하면 겨우 남편 인건비 떨어지는 것이다. 하기야 나도 약국 해봐야 내 인건비 나온다. 그게 좋다. 성실히 일한 나의 몫이 나오는 것,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은 도둑의 맘보다. 그것이면 충분한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직업이 있다. 자기 직업에서 기쁨을 얻고 힐링까지 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가 아닐런지. 포도가 싱싱하고 맛있다고 잘 사가니 나 또한 피곤한 줄 모른다. 산이 높으면 골도 깊다고 올 여름이 더웠던 만큼 포도장사도 더 잘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