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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생에 그 제자

윤복순 윤약국약사

모임에 다녀왔다. 그곳에서 김치 장인을 만났다. 그녀는 우리 모임의 자문위원이고 그날 처음 만났다. 그녀의 김치 이야기가 이어졌고, 특히 전라도 전주 김치를 알리고, 한국의 김치를 식문화예술로 승화시키는데 수십 년째 애쓰고 있다고 했다.

돌아오는 길에 그녀의 자서전을 받아왔다. 그녀가 매년 일본에서 김치 담그기 행사를 하고, 김치 사업을 하다 보니 통역 없이 일본어를 해야겠다는 의욕이 생겨, 독학으로 일본어를 배워 김장행사 때는 손수 한다는 내용이 있다.

나도 일본어를 배워야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일본어의 히라가나도 모르는데 말이다.

십오 육년 전 처음으로 일본에 갔다. 대학생들의 일본의 농업정책에 관한 여행이었는데 우연히 따라가게 되었다. 관광이 아니라 농산물을 전농(농협)에서 어떻게 유통하는지, 정미소에서 나락을 어떻게 보관해야 햅쌀 같은 밥맛이 나는지 설명을 들었고, 농산물 경매시장, 방울토마토 농장, 국화분재 전시장 등을 방문했다.

그때 교수님이 통역 없이 설명해 주는 것을 보고 왕초보 일본어 첫걸음 책을 샀다. 아 이 우 에 오를 외우며 쓰기부터 했다. 글자도 이상하게 생긴 데다 영 외워지지 않아 내박쳐 두었다. 그리고 까맣게 잊었다.

올 1월 일본에 갔다. 남편 사무실 부하들과 부부동반으로 갔는데 제일 막내의 부인이 문화센터의 일본어 강좌에 나가고 있는 중이라며 몇 마디 했다. 그러나 막상 어느 술집에서 술 한 잔씩 하는데 주문할 줄을 몰라 몸언어로 했다.

집에 돌아와서도 일본어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왜 김치 장인의 책을 읽으며 의욕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바로 책장을 뒤져 일본어 책을 찾아냈다.

쓰고, 읽고, 말하고, 듣고, 다 하기는 어렵다. 영어는 쓰고 읽을 줄은 알지만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해 지난 여행 때 비행기 안에서 망신을 당했다. 비상구 쪽 좌석엔 영어나 자국어가 능통한 자가 앉아야 한다는데 나는 앞이 넓은 것만 좋아했지 영어도 스페인어도 못해 그 자리에 앉을 수 없었다.

아이들이 글은 몰라도 말은 하고 또 알아듣지 않던가. 나도 그렇게 하기로 했다. 어릴 적 팝송을 배울 때 한글로 써서 외웠던 것처럼. 바로 실전에 들어갔다. 코레와 난 데스까. 소레와 카사데스. 묻는 말엔 까가 붙는다는 것도 알았다.

남편에게 잘난 체를 했다. “일본어 쉬워. 영어같이 의문문을 만들 때 주어 동사를 바꾸지도 않고 조동사를 쓰는 것도 아니고 뒤에 까만 붙이면 돼.” “그래, 쉽네.” 남편도 맞장구를 쳐 줬다. 문장 하나 익히면 바로 남편을 제자로 삼아 실기연습을 했다. 어순이 우리말과 같아 독학이 가능하고 영어의 절반 정도만 노력해도 잘할 수 있겠다며 큰 소리를 쳤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책입니다, 연필입니다, 책상입니다 등을 겨우 말로 할 수 있는 실력이다. 물론 쓸 줄도 읽을 줄도 모른다. Nice to meet you. 는 뭐라고 하냐고 묻는다. “아직 거기까지 진도 안 났거든.” 제자가 너무 앞서가서 탈이다. 이제 3과에 들어갔다.

남편이 포도밭으로 출근하면서 “갔다 올게.”한다. “잇떼랏샤이(다녀오세요.)” “오! 당신 있어 보인다.” 분명히 아침마다 일본말로 인사하자고 알려 주었는데 남편은 벌써 잊어버렸다.

선생이 가르쳐 준 것이나 따박따박 외웠으면 좋겠는데 엉뚱한 것만 물어보며 자꾸 선생 실력을 테스트하니 내 체면이 말이 아니다. 우리 아파트에 일본인이 살고 있어 가끔씩 약을 사러 오는데 내가 일본어를 시작한 뒤론 한 번도 안 왔다. 물어볼 것이 많은데.

일요일 포도밭에서 풀을 뽑았다. 지난 일요일에 손자 손녀를 보러 서울 아들네 집에 갔다 왔더니 풀이 장난이 아니다. 하우스 한 동 나가는데 근 두 시간이 걸렸다. 다음 칸으로 들어갔는데 난데없이 남편이 “복순상, 잡초 입빠이 데스까.”하고 물었다. 실컷 웃다가 “데스까가 아니고 아리마스까야.” 데스까는 입니까고 아리마스까는 있습니까라고 제법 선생 티를 냈다.

진도가 나갈수록 문장이 길어지고 어미의 변화가 온다. 단어도 모르는 단어가 자꾸 나온다. 혀는 꼬이고 겨우 겨우 외워 놓았는데 아침에 운동 나가 걸으면서 어제 외운 문장을 떠 올려 보면 머릿속이 하얗다. 겁이 난다. 중간에 그만두지 않으려는 각오로 남편을 제자 삼았다.

“날도 덥고 지치는데 맛있는 것 먹고 싶다는 뭐라고 해?” 제자는 이렇게 훅 들어온다. 이런 펀치가 나를 작심삼일로 끝나지 않게 한다. 콩나물 기를 때 물이 시루 구멍으로 다 빠지는 것 같지만 콩나물은 자란다. 다 잃어버리고 하루에 한 문장만 익혀도 그게 어딘가.

왜 일본인 아줌마는 빨리 약 사러 안 오는 걸까. 알듯 알듯할 때 조금만 짚어주면 훨씬 수월하게 깨우치련만. 김치 장인이 대단해 보이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