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복순 윤약국약사

손자와 손녀가 온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할아버지 할머니가 살고 있는 큰 집에 오는 것이다. 손주들은 생후 6개월로 쌍둥이다. 며느리는 한 달 전부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애기 둘을 데리고 오자니, 그것도 추석이라는 대명절에 도로가 얼마나 막힐지 모르는데, 장시간 애기들이 잘 견뎌줄지 걱정이 앞서는 모양이다.

틈을 내서 쌍둥이들을 카시트에 앉혀 할 일 없이 차 타는 연습을 시켰는데 카시트에만 앉히면 자지러지게 운다는 것이다. 눈치를 보니 시어머니인 내가 시아버지한테 말씀 잘 드려서 애기들이 좀 클 때까지는 내려오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달라는 것 같은데 남편에게선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시간 맞춰 오라는 것도 아니고, 내려와서 음식 장만을 하라는 것도 아닌데. 남편 얼굴이 편하지 않다.

며느리에게 전화를 했다. “미현아, 애기 심장과 너의 심장을 잘 맞추고 등을 도닥이며 인생길에는 꽃길만 있는 것이 아니고 가시밭길도 있단다. 이번에 그 가시밭길을 가야 한다. 그 길은 다 가는 길이거든. 어차피 가야 하는 길이니까 짜증내지 말고 편안하게 가자. 네가 엄마 좀 도와줘. 이렇게 말하고 카시트에 앉혀봐. 신기하게 애기들도 말귀를 알아듣는다.”

아들 며느리가 도착했다. 사돈 처자까지 왔다. 애기들의 이모가 도우미를 자처해 같이 온 것이다. 사돈은 시댁이 구미인데 익산까지 애기들을 돌봐주며 왔다가 오송으로 올라가 다시 구미로 내려간단다. 덕분에 손자 손녀가 거의 울지 않고 왔단다. 고맙고 미안하고 그렇다.

손자 손녀가 나를 보더니 해죽해죽 웃는다. 지금까지의 염려와 피로가 봄눈 녹듯 풀렸다. 무슨 꽃 무슨 꽃 해도 사람 꽃이 제일 예쁘다고 금시 집에 온기가 돌고 사람 사는 집 같다. 애기 우는 소리가 나고 발자국 소리도 바쁘다. 이래서 다섯 시간 열 시간 고생을 하면서 민족 대이동을 하는구나. 애기들이 고생하니 내려오지 말라고 했더라면 얼마나 쓸쓸한 명절이 되었을까.

바로 이때다. 남편이 요양병원에 계시는 시어머니를 모셔오겠단다. 솔직한 내 마음은 모셔오지 않으면 좋겠다였다. 그렇지만 대놓고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남편이 알아서 그래 주길 바랐다. 나보다 며느리가 면역력이 약한 애기들한테 요양병원에 계시는 시할머니를 모셔오는 것은 달가운 일이 아닐 것 같았다.

시어머니는 오셨고, 어머니가 포도를 맛있게 드시니 따 드리고 또 따드리고 큰 송이 하나를 단숨에 드셨다. 시어머니는 치매라서 먹는 욕심이 있고 밥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남편은 잘 드시는 것만 좋아서 또 한 송이를 어머니 앞에 놓아드린다.

시어머니가 밤새 화장실을 네 번 다녔다. 혼자서는 못 가니 내가 모시고 다녀야 한다. 기저귀를 착용했지만 적당한 간격으로 애기들처럼 쉬를 시켜야 한다. 병원 침대는 양 옆으로 보호 장치가 있지만 집에는 그게 없으니 방바닥에서 주무셔야 한다. 일어날 때마다 나 혼자서는 일으킬 수 없어 남편을 깨우다 보니 온 식구가 다 잠을 설쳤다.

잠깐 골아떨어졌을까.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깨어보니 그 사이 이불에 실례를 해놓았다. 요가 다 젖어있다. 구십 줄에 가까운 시어머니는 그야말로 피골이 상접해 있으니 까는 것이 얇으면 엉덩이가 아플까 봐 이불을 반으로 접어 두 장 깔아 네 겹으로 했다.

샤워기로 간단히 씻겨드렸다. 좋아하신다. 요양병원에서 언제 목욕다운 목욕을 해 보셨을까. 이런 와중에도 남편이 욕실 앞에 얼씬거리면 부끄럽다고 저리 가라고 손을 내젓는다. 소변보러 갈 때도 아들이 모시고 갈라치면 내외를 하며 한 발도 떼지를 않는다. 나 혼자 감당하기에는 힘이 벅차다. 환자복을 입은 채로 나오셨기에 새벽에 옷을 빨아 널었다.

명절에 손자 손녀가 내려오면 업어주고 잠깐이라도 며느리 좀 쉬게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시어머니 목욕을 시켜드려야겠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손주들은 짝 소리 없이 잘 자고 잘 놀았다. 시어머니에게 더 신경 써 드리라는 뜻인 것 같았다.

며느리는 휴직을 했고 도우미도 온다. 그런데도 쌍둥이 키우기가 그리 녹록하지 않을 것 같아 틈틈이 위로를 해주고 쌍둥이들과는 영상통화를 한다. 시어머니는 가까운 요양병원에 계시는데 두어 시간은 고사하고 일요일에도 못 가 뵈는 날이 더 많다.

“애기들은 자고 나면 예쁜 짓 예쁜 짓이고, 노인네는 자고 나면 미운 짓 미운 짓이다” 는 말이 있다. 나도 노인네가 되어 가는데 시어머니가 예쁘게 보이지 않는다.

명절 쇠고 바로 시어머니를 요양병원에 모셔다 드렸다. 마음이 편하고 아무 할 일도 없는 것 같이 홀가분하다. 손자 손녀들도 갔다. 애기들이 방긋방긋 웃고 기분이 좋으면 손발을 움직이며 키득키득 소리도 질렀다. 엎어져서 한참을 놀았다. 옹알이도 한다. 그런 모습을 좀 더 보고 눈을 맞추며 얘기도 많이 하고 싶었는데 금방 가서 섭섭하다.

다시 일상이다. 시어머니가 금방 가신 것은 마음 편하고 손자 손녀가 금방 간 것은 아쉬움이 남는 이 마음, 시어머니의 모습이 곧 나의 자화상인데 이래도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