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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情

윤복순 윤약국약사

포도 파티가 끝났다. 큰일을 끝내고 나면 흔히들 시원섭섭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뿌듯하다. 많은 사람을 초대했고 그들이 기쁜 마음으로 와서 실컷 즐기고 흡족한 마음으로 돌아갔다. 올여름 같은 더위를 이겨냈기에 고생한 만큼 더 보람이 있다.

매출의 3% 정도를 남겨두고 포도 출하를 마감했다. 남편이 친인척들과 나눠먹고 싶다고 해 기꺼이 동의했다. 2주간 파티는 지속되었다. 시댁 작은집 사촌들을 시작으로 요일별로 초대하고 한집 당 하우스 한 동 내지 두동을 분배했다.

직접 포도를 따보고 많은 얘기를 나누고 자기들이 딴 것을 가지고 가서 아는 사람들과 나눠먹을 수 있다는 것, 아니 이 가을의 풍요를 마음껏 누릴 수 있음을 좋아했다.

남편의 초등학교 동창들, 중고등학교 친구들, 군대 동기들, 부하들, 후배들, 모셨던 상사 분들, 여행에서 만난 부부, 농대 교수님, 친정 식구들과 사돈댁들, 이번 파티에 왔던 사람들이다.

지난 일요일엔 아들네 처가 식구들이 왔다. 아들과 며느리는 애기들 때문에 오지 못했다. 아들의 장인 장모는 물론 처이모와 이모부, 외삼촌과 외숙모, 바깥사돈의 친구 내외가 왔다. 친구 분은 “제가 미현이(며느리) 신랑을 아주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미현이 신랑도 나만 보면 90도로 인사를 하고 저 멀리서부터 온 얼굴에 미소를 띠네요.” 아들을 예뻐해 줌은 물론 바깥사돈과의 돈독한 우정도 과시한다.

점심은 매번 가는 식당으로 갔다. 밭에 손님이 올 때마다 모시고 가는 곳이다. 요즘은 TV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셰프가 왔다 갔다고 해 예전같이 조용하진 않지만 맛은 항상 그 맛이다.

서울 사람들에게 전라도 음식은 별미다. 민물매운탕(빠가탕)은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우리 세대에겐 괜찮은 한 끼 밥이다. 포도 따는 일을 했기 때문인지, 일찍 출발한 때문인지 그들이 정말 맛있게 밥그릇을 다 비웠다. 너무 맛있게 먹었다고 큰 대접을 받았단다.

그들이 차 안 가득가득 포도를 싣고 가면서 한 말은 내년에는 트럭을 가지고 와야겠단다. 재미있고 즐거웠고 행복했다. 그들이 서울에는 포도가 없어서 왔겠는가. 초청한 자의 자부심을 살려주고 가을 하늘만큼이나 기분이 높아짐을 맛보게 해 줬다.

이번 토요일엔 딸네 시댁 식구들이 왔다. 어른 여덟에 애기들이 일곱이다. 딸네 시동생 내외가 왔고 그들의 애기가 둘이다. 딸은 시동생과 대학 동기다. 또 동서와는 동료 교사로 친구같이 지낸다. 그들이 사돈댁에 온 것이 아니라 친구네 집에 간다는 기분으로 왔다고 했다.

모처럼 아이들이 “뛰지 마, 조용조용해.” 이런 소리를 듣지 않고 맘껏 뛰고 큰 소리로 언니 오빠를 부르고 넘어져서 울고 그야말로 신나게 놀았다. 유치원생 이상은 직접 포도를 따보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따놓은 포도를 나르고, 그 이하 애기들은 나무에 달려있는 포도를 만져보고 엉성한 포도 한 알을 따보기도 했다.

바구니에 쌓이는 풍성함을 아는지 세 살짜리 손녀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나도 흐뭇한데 안사돈 바깥사돈은 당신의 친손자 손녀인데 두 말해 무엇할까. 포도밭에서 누리는 풍요고 호사다.

일요일엔 군단에 근무할 때 모셨던 참모님을 비롯한 사무실 식구들이 모였다. 모두 일곱 가족 열네 명이다. 이젠 모두 퇴직했고 그 당시 남편의 보좌관이었던 박대령만 현역이다. 그도 올 연말에 퇴직을 한다. 그런데도 만나면 그때 이야기로 꽃을 피우고 십년 아니 이십년은 젊어진다. 참모님은 별을 세 개나 달고 퇴직을 했는데도 영원한 참모님이다. 사모님이 압화로 만든 목걸이를 선물이라며 내놓았다. 하나씩 뽑는 재미도 있었다.

포도가 없어도 우리가 초대를 한다면 그들이 우리 집에 오기는 하겠지만 매년 오기는 힘들 것이다. 포도가 있기에 일을 해 주러 오고 당연히 포도 파티에도 온다. 남편은 이것이 포도농사를 하는 이유라고 말한다. 아들딸이 애기들을 데리고 와 마음껏 뛰놀고 땅을 밟고 풍요를 맛보고, 친구 친척들이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은 우리 집에 우리 밭에 올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는 것이다.

친근한 마음도 많이 받았다. 파김치, 도토리묵과 묵간장, 배에서 간했다는 간고등어 두 손, 마늘 한 접, 가지, 호박, 고구마, 쌀, 기정떡과 쇠무리찰떡, 친정에서 가져왔다는 멸치, 포도밭에서 쓰라고 화장지, 산에서 캔 걸로 담았다는 단풍마술, 친구네 농장에서 따다 만들었다는 복분자엑기스, 산삼 두 뿌리, 사과 한 상자, 사과와 배로 담은 깍두기까지.

서울, 대전, 대구, 광주, 계룡에서, 그곳엔 포도가 없어서 그들이 시간을 쪼개 익산까지 오겠는가. 그들이 우리의 초대에 고마운 마음으로 찾아주니 우리는 영광이고 감사하고 마음 뿌듯하고 행복하다. 서로 오랫동안 잘 알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이 내 곁에 있다는 것이 매우 매우 중요한 일임을 해마다 확인하며 살아간다.

“이 맛있는 포도 먹으려면 일 년을 기다려야 돼?” 이 한 마디가 지금까지의 피로를 확 풀어주고 내년을 기약하게 한다.

매년 하는 행사인데 올해 유독 더 고마운 것은 올여름이 몇십 년만의 더위였기 때문일 것이다. 올여름 더위는 남편의 허리둘레를 혁대 구멍 두 칸이나 줄여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