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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 일기

왕궁면장

채수훈

옛 학창시절 한번쯤 일기를 써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쓰고 싶어서 쓴 것이 아니라 학교 숙제라서 어쩔 수 없이 작성했다. 특히 방학이 끝날 무렵에 몰아치기로 쓰기도 하였다. 날씨가 기억나지 않아서 해님을 그려 넣기도 했다. 쓸 내용이 마땅치 않아서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밥 먹고, 부모님 심부름과 친구들과 뛰어놀고 등 매일 비슷한 일들의 반복적인 글들이었다.

지난 여름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 답사팀과 가람문학관을 찾았다. 가람문학관은 전국 문학관 중 막내 격이며 익산시에서는 최초 문학관이다. 이병기 생가와 일란성쌍둥이처럼 나란히 앞집과 옆집으로 이어져있다.

가람문학관은 외관상 별다른 것은 없고, 전시관에도 특별히 변한 것이 없었다. 회원들이 관람하는 틈을 타서 제일 먼저 도서실을 찾았다. 작년에 없어서 아쉬웠던 <가람일기> 3권(2019년)이 책장에 꽂혀있었다. 책에는 전북대학교 출판문화원‘증정본’이라 찍혀있다. 작년에 왔을 때 문학관에서는 발간된 지도 잘 모르고 있던 책들이다. 책을 펼쳐보면서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가람문학관의‘남겨진 기록, 가람일기’에 따르면“가람은 19세인 1909년 4월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하여 1966년 6월까지 무려 58년간 일기를 기록하였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수감된 시기를 제외하고는 꾸준히 오랜 세월 일기를 써나갔으며 와병 중에도 중단 없이 두어 줄이라도 쓰고자 하였다.”고 했다. 그러면서“주목할 점은 1909년 4월 13일까지 한문일기를 쓰던 가람이, 1914년 8월 12일부터 한글 표기로 쓰기 방식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이는 주시경 선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전북대학교에서 <가람 이병기 전집> 총 30권 발간 작업을 하고 있다. 작년 연말 10권이 완간되었고, 이중 1-5권까지가 일기다. 가람 일기 원본은 유가족이 보관하고 있다. 전북대학교에서 출판을 위해 원본을 빌려 집필 작업을 하고 있다.
아쉽게도 가람문학관은 작년과 올해에도 한발 늦는 것 같다. 4-10권을 아직 증정 받지 않아서 없는 것인지, 발간된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예산이 없어서 책을 구입하지 못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안내원도 잘 모른다. 전집 발간에 즈음하여 이참에 유가족과 잘 협의하여 일기 전체의 복사본이라도 문학관에 전시하면 의의가 있지 않을까 한다.

가람 일기는 58년 동안 때로는 한자로 때로는 한글로 때로는 국한문 혼용으로 씌어졌다. 아직 전집을 읽어보지 않았지만 문인의 일기이기에 사료적 가치와 문학 의미도 빼어날 것으로 여겨진다. 먼 훗날 고문서가 될 듯하다.

임종국 선생은 <친일문학론>에서 가람을“단 한 줄의 친일 문장도 쓰지 않은 분”으로 기록하고 있다. 타 지역은 문인들의 문학관을 건립해 놓고도 친일, 군사정권 찬양과 변절로 시시비비가 끊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가람은 저 산의 푸르른 소나무처럼 독야청청 외길만 걸어왔다. 근대 한글 지키기와 국문학에 끼친 영향은 넓고 깊다. 역시 가람 이병기하면 익산, 익산하면 가람 이병기이다.

가람문학관에 다녀 갈 때 마다 타 문학관에 비해 왠지 예우가 초라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어느 문학관이건 방문할 때마다 항상 아쉬운 여운이 남는데, 제발 박제된 공간이 아닌 살아 숨 쉬는 창조공간으로 승화시킬 수 없을까?
비록 늦었지만 <가람 이병기 전집> 발간은 근현대 문학인 중 최대의 작업에 속한다. 이 전집이 완간되면 책 보급운동과 독서를 통하여 가람의 문학사상과 민족정신을 재인식시키는 전환점이 되었으면 한다. 또한 가람을 통하여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과 한국전쟁의 격동기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 같다.

이에 동참하는 뜻에서 내년‘익산시 독서마라톤’은 <가람 이병기 전집>으로 참여해 보겠다. 문학인의 일기를 몰래 들추어보듯이 책으로 마주한다니 벌써부터 가람이 마음속에 따뜻하게 다가온다.

가람문학관 밖으로 나오니까 동쪽 저 멀리 익산 주산인 천호산이 한눈에 비추어 준다. 뒷산은 용화산 자락이다. 가람은 말했다.“내가 고적한 용화산 진사동에서 생장하여 나의 십여에 가장 반기던 건 그 주위 산야의 대자연한 풍경이었다. 이것이 가장 인상이 깊고 기억이 새롭다.”고 했다. 문학 작품과 일기 속에도 그 풍경이 녹아있지 않을까.

진사동은 가람이 태어나고 자란 생가가 있는 곳이다. 글을 쓰고 돌아가신 후 뒷동산 대나무 숲길을 따라 가면 양지바른 곳에 묻혀있다. 여기에 가란문학관에서 그 삶의 흔적을 엿볼 수 있으니까 생전 삼복지인(술, 난촌, 사람)을 넘어서 사후 문학관을 포함한 사복지인이 된 듯하다. 참 복 많은 큰 어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