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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

윤복순 윤약국약사

그녀가 휴대폰을 자꾸만 만지작거린다. 그의 얘기를 할 때면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돌고 입이 귀에 걸리고 말소리가 풍선처럼 하늘에 둥둥 떠다닌다. 자꾸 불러내서 귀찮아 죽겠다고 하면서도 그의 전화를 기다리고 받으면 안절부절 서둘러 나간다.

그들은 오십년도 훨씬 전에 만났고 지금까지 잘 지내는 사이다. 일곱 살이나 위인 그를 어른으로 끔찍하게 모셨다. 그는 명문고와 명문대를 나온 실력파고 그녀는 보통의 여고와 지방대를 나와 그에 대한 자격지심 같은 것이 있다.

젊을 때는 감히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할 어른으로 알았다. 그의 말에 토를 단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시골 촌뜨기로 서울생활을 몰라 더 기가 죽었다. 지금은 그녀가 그를 이리저리 놀리고 거꾸로 구박을 주기도 하며 큰소리를 친다.

그는 술을 좋아했고 비서 아니 후배들이 많아 운전을 배우지 않아 면허증도 없다. 그는 회사의 요직에만 근무한 엘리트일 뿐만 아니라 발이 넓어 그녀가 회사생활할 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녀도 분발하여 팀장에 올랐고 대학원에 진학해 석사학위도 받았다. 또 위트가 있고 순발력이 있어 여러 사람에게 인기가 좋다. 노래를 특히 가곡을 잘 부른다. 그녀의 노래를 들은 사람이 음악대학에 갔으면 좋겠다며 학비에 보태라고 거금을 주기도 하고, 대학 총동창회에서 부른 노래가 부회장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이렇게 바쁘게 살다보니 그를 잊었을까.

잘나가던 그는 퇴직을 하고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그 당시 중국과의 문호가 열리고 너도나도 중국관련 사업이, 중국에 가서 사업하는 것이 봇물을 이룰 때였다. 그도 그런 사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사기를 당해 망했다.

그는 그 기관의 원로원에 있으며 생활보호대상자다. 사기를 당해 창피하기도 하고 재산도 다 잃어 모든 사람과 연락도 끊었다. 그렇게 20여 년이 흘렀다. 그 사이 사기 친 자의 잘못도 찾아내 보상을 받을 수도 명예회복할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그는 더 이상 그 문제로 사기꾼과 얽히기도 싫고, 그자는 젊고 가정이 있는데 지금 와서 영창을 보낸들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으로 다 잊기로 했다.

그녀는 월급 받은 것을 따박따박 모아 노후 걱정은 없다. 차도 있고 운전도 잘한다. 곳간에서 인심난다고 돈도 잘 쓰고 따르는 후배도 많다. 또 그녀를 믿고 따르던 사람을 어려울 때 도와주었는데 지금은 사업이 번창해 큰 부자가 되었다. 그 사람이 매달 용돈도 보내준다.

그와 그녀가 연락이 닿아 다시 만난 지 2년이 넘었다. 이런저런 이유를 만들어 그녀를 불러내고 그녀는 그를 놀리는 재미가 있다. “어떻게 법대 나온 양반이 도장도 찍을지 몰라 사기를 당해요?” 이렇게 아픈 곳을 콕콕 찌르는 것도 다반사다.

어느 날 그가 불러내 급하게 가다가 속도위반을 했다. 거금 칠만원 짜리 딱지가 날라 왔다. “A님 법대 나왔으니 내 딱지 건 좀 해결해 줘요.” 이런 말을 해 그가 기가 막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기도 하고, “차 한 번 탈 때마다 백만원 씩 내세요”해서 가뜩이나 영세민 생활보호대상자인 그의 기를 죽여 놓기도 한다.

그는 자기 놀려먹을 궁리하느라 머리 쓰니 치매는 걸리지 않겠다며 역으로 자기 만날 때마다 천만원씩 달라고 한다. 막상막하다.

어릴 때 일곱 살은 큰 차이다. 초등학생과 대학생이니 게임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나이 먹어 가면서 칠십대 중반과 팔십대 초반은 거의 같은 나이다. 그와 그녀는 결혼을 하지 않아 처녀 총각이다. 적적하게 나날을 보내야 하는데 같은 직장생활을 했기에 할 얘기도 많고 추억도 많고 무엇보다 말이 통한다.

나이 먹으면 얘기할 상대가 없다. 고등학교 동창이 중학교 교사로 퇴직을 했는데 집에 있으니 말이 고프다고 했다. 벽보고 말을 할 수도 없고. 그와 그녀는 노년에 말상대보험 하나 잘 들어놓은 것 같다.

그녀에게 매달 용돈을 보내주는 사람이 그 돈을 그에게 주면 어떻겠냐고 해서 그녀가 기꺼이 나는 살만하니 그렇게 하라고 했단다. 그 사람이 어려울 때 도와줄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은 그가 해 준 것이다.

혼자 살고 혼자 밥을 먹으니 맛도 없는데 둘이 맛있는 것도 사먹고 옛날 얘기도 하고 가까운 곳에 산책도 가니 그와 그녀는 얼굴이 밝아졌다. 보기 좋고 활력이 있다.

하루는 피로회복제 제일 좋은 것을 찾았다. 칠천원인데 그에게 이만원을 달라고 했단다.

“그리도 순박하던 네가 어찌 그리 변했냐? 돈을 줘도 안 받더니.”

“내 나이가 몇인데 지금까지 그대로면 큰일 나지요.” 말만 그렇지 그녀는 그가 아플까봐 노심초사다.

어느 날 그녀가 처음 보는 옷을 입고 왔다. 멋지고 비싸 보였다. 그가 생일날 친지 후배들에게 받은 용돈을 “너 입고 싶은 옷이나 한 벌 사 입어라”하면서 다 주었단다. 벼룩의 간을 내지 어떻게 돈 한 푼 없는 양반의 돈을 받을 수 있냐고 했더니 그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싶었단다. 그녀는 그에게 잘 맞는 옷을 사드리고는 “너무 멋져 바람날까 걱정 되네요”라고 했다.

그녀는 나이에 비해 열 살은 젊어 보인다. 그는 그 나이로 보인다. 시골 어디로 드라이브를 갔다 슈퍼에서 물을 사고, 그가 돈을 내고 그녀가 잔돈을 받으려는데 “이리 주세요” 하며 그가 받았다. 슈퍼 아주머니가 어찌 젊은 여자가 노인네하고 살면서 거스름돈 한 푼도 못 챙길까 짠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더란다.

그녀가 휴대폰을 꺼내든다. 나는 그들에게서 황순원님의 소나기를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