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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自畵像)

(사)한국예총 익산시회장

김영규

17세기 초 이탈리아 로마 태생의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서양 최초의 여성 화가로 알려져 있다. 반면, 한국 최초의 여성 화가는 나혜석이다. 수원 출신인 그녀는 1910년대 일본 도쿄에 유학을 했고 서울에서 한국 여성 최초로 서양화 전시회를 연다. 1920년대에는 세계 예술의 수도라 불리는 파리에 체류하면서 ‘스페인 국경’, ‘파리 풍경’ 등을 제작하였고 귀국 후에는 ‘무희’, ‘자화상’ 등 문제작을 남겼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와 나혜석의 공통점은 예술사에 자신의 이름을 처음으로 등재시킨 여성이라는 점과, 이런 시대 여성들이 남성의 그늘에 가려 존재감이 사라진 상황에서 자신의 작품에 서명을 남긴 것은, 목숨을 걸고 얻어낸 고귀한 결과였다. 따라서 그 과정이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았을 거라는 예상을 할 수도 있다. 나혜석은 그림은 물론 소설과 시, 칼럼, 평론 등 글쓰기에도 능하여 21세기의 바람직한 인간 유형인 멀티 플레이어였다. 또한 유교사상이 강한 당시에 세 아이의 어머니로 아이의 이름에 부계, 모계 성 씨를 동시에 쓴 남녀 평등주의자였다는 것은 같은 미술인으로서 자랑이 아닐 수 없다.

21세기에 나혜석의 선구적인 의식과 영역이 역동적으로 부활하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오로지 작가란 시대의 부침과 세월의 풍화작용을 거슬러 올라, 예리하고 단단한 판단력이 빛을 내는 존재이기도 하다.

지난해 말 나혜석의 출생지 수원의 행궁 옆에 수원 시립미술관이 개관되고 개관 기념작으로 나혜석 '자화상' 원작을 80여년 만에 처음으로 공개했다.

자화상이란 자신이 자신의 모습이나 마음을 글로 쓰든, 그림으로 그리든 예리하게 관찰하여 기록하는 형식이다. 나는 누구이고,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되돌아보고, 내일의 나를 상상하고 반성하는 모습의 상이 자화상인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나, 글을 쓰는 작가나 작품의 가장 가까운 소재의 대상은 자신이다. 자신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림으로, 글로 옮기는 작업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 가감 없이 솔직하게 옮긴다면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누구나 잘 아는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평범하면서도 쉽지 않은 경고다.

평소 가까이 지내는 친구는 나에게 자기의 자화상을 그려달라고 말했다. 나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다시 반복하여 재촉하길래 “자화상은 자기가 자기의 낮짜닥을 그리는 것이 자화상이다. 나에게 부탁한다면 자화상이 아니라 초상화이다”라고 설명해 주었지만 완벽한 소통이 어렵다. 적반하장 반대로 여러 장 그려달라고 욕심을 부린다.

인간에게는 욕심이 있다. 욕심은 당연한 것이며, 6년여 전에 입적하신 법정 스님의 무소유의 삶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인간이 글자 그대로 '무소유'의 삶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다못해 옷 한 벌, 안경 하나 신발 등 개인 소유물을 일절 지니지 않고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법정스님의 ‘무소유’란 절대 아무것도 지니지 않고 산다는 뜻이 아니라, 가급적 욕심 부리지 말고 필요한 어떤 것을 최소화하여 소박하게 생활한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우리가 살면서 사심을 버리라고 곧잘 이야기하지만 생각해보면 사심을 버리라는 것은 인간이기를 포기하라는 말과 다름없이 느껴진다. 인간의 욕심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숙명적인 인간 조건이 아닌가 생각된다.

예를 든다면 간디의 욕심에 관한 이야기다. 간디의 생에 대하여, 간디의 희생에 대하여 서양의 한 기자가 질문했다. “당신은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평생 남들을 위해서 자기희생적인 일생을 살아왔느냐?”는 질문에 “자신이 자기희생을 한 적은 한 번도 없다”라는 게 간디의 답변이었다. 이어 간디는 자기가 남들을 위해서 희생하였다고 보는 것은 전혀 오해라고도 했다. 겉으로는 어떻게 보이는지 모르지만 내 이웃이 인간다운 삶을 살고, 내 조국이 독립해서 떳떳한 나라가 되어야 내 자신이 인간답게 살 수 있기 때문에 내가 비타협적으로 싸워왔을 뿐이며, 그런 점에서 나는 어디까지나 나 자신을 위해, 내 욕심을 위해 살아왔을 뿐이라는 게 간디의 설명이었다.

이 무더운 날에 걸친 옷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고, 써보자. ‘무욕’의 생각에서 정확하고 섬세하게 살피고 반성한다면 훌륭한 자화상이 탄생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