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시민 유 성 무

원효 대사가 살았던 통일신라 말기에는 오교구산(五敎九山)으로 표현됐던 것처럼 많은 교종과 선종 종파들이 부처의 가르침에 대한 각기 다른 접근방법과 정치적 입장을 취했다. 희대의 천재 원효는 각 종파의 소의경전(所依經典)에 달통했던 모양이다. 그는 불법(佛法)의 요체는 하나인데, 이를 이해하는 방법론적 차이에서 나온 종파 사이의 대립과 본질 왜곡에 대한 해법으로서 화쟁(和爭)을 들고 나온 것 같다.

화쟁은 말 그래도 서로 대립하는 불교 종파의 학설과 이론을 조화시키는 실천적 행위다. 그 어떤 학설과 이론도 불법의 실체와 현상을 두루 설명할 수 없다. 학설과 이론은 그 시대적 맥락 속에서 부처의 깨달음 일부만을 논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어느 것도 절대불변의 궁극적 방법론이 될 수 없다. 다만 서로 보완적인 관계에 있기 때문에, 서로 소통하여 회통(會通)함으로써 참된 구도의 방법론에 가까이 갈 수 있을 뿐이다.

화쟁은 또한 각 종파의 주된 방법론에 대한 우열을 가리는 것도 아니다. 화쟁을 하려면 먼저 자기에 대한 철저한 성찰을 하면서 상대의 다른 접근방법에 대해 열린 자세를 가지고 궁구해야 한다. 그래야 서로가 한 걸음 더 진리에 가까이 갈 수 있다.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으면서도 명확한 자기 세계를 만들어가는 중도(中道, madhyama-pratipad)-중도(中度)가 아닌-의 방법론을 제시한 부처의 가르침에 충실함으로써, 위로는 진리를 체득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복되게 하자는 불교의 본래 목적을 이루자는 것이 화쟁의 실천적 가치라고 이해된다.

원효 이후 교종과 선종의 오랜 방법론적 차이를 명쾌하게 정리한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조선시대 서산대사다. 서산대사는 저서 <선가귀감(禪家龜鑑)>에서 “선은 부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의 말씀이다. 말이 없음으로써 말없는 진리의 세계에 이르는 방법이 선문(禪門)이고, 말로써 말없는 진리의 세계에 이르는 방법이 교문(敎門)이다”라고 밝혔다. 선과 교가 모두 같은 진리에 이르는 방편이고 단지 견해와 수행방법의 차이일 뿐이니, 대립할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화쟁의 가르침을 되새겨보니, 도대체가 화쟁 없는 우리의 정치현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불법의 목적이 상구보리 화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이듯이 정치의 목적은 국태민안(國泰民安)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더불어 살 수 있는 정의로운 사회 구현이다. 물론 이를 달성할 수 있는 방법론은 대단히 많을 수밖에 없으니, 다양한 정치세력의 등장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문제는 정치의 목적 달성을 위한 정치세력 사이의 대국적 협력과 치열한 경쟁이 이뤄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일차적으로 정치의 궁극적 목적에서 다름이 있어서는 안 되며,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독자적이고 합리적인 방법론이 확립돼야 한다. 이 두 가지 조건이 모두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국태민안을 위한 협력과 경쟁은 불가능하고, 오직 당리당략적·정파적 대립만 있을 뿐이다.

뚜렷한 지향점과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 정책이 없는 정치세력은 특정인의 영향력이나 일부 세력에 기댈 수밖에 없다. 열린 자세로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는 것은 고사하고 자기 성찰조차 할 수 없다. 그러니 대국적 협력 자체가 불가능하며, 정책적 경쟁은 바랄 수도 없다. 오로지 자기 또는 자기가 대변하는 세력의 알량한 이익만을 주장하면서 개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으니, 나라는 망가지고 민생은 도탄에 빠지게 된다.

며칠 전 20대 국회가 모처럼 여소야대 정국으로 막을 올렸다. 국내외적으로 온갖 문제가 터져 나오고 대선이 불과 1년 여 남은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 정당 사이는 물론이고 당내의 화쟁을 통한 협력과 경쟁이 절실한 때다. 그렇게 하려면 먼저 각 정당 및 정당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정립하고, 정책적 실천을 통해 이를 증명해야 한다.

서로 다른 극을 동시에 가져야만 자석이 되고 좌우가 대칭돼야 균형이 제대로 잡히듯이, 정치권의 이념적·정책적 대치는 문제가 아니다. 다만 선명한 정체성과 치열한 정책적 실천의지를 바탕으로 시대정신을 담은 정치 목적을 이루기 위한 화쟁이 가능한지가 문제다. 화쟁 없는 정치적 대립은 오만과 무지의 표출이며, 그 이면에 민생을 도외시하는 사리사욕이 숨겨져 있음을 자인하는 것과 다름없다.

지금 원내 정당 중 그나마 정의당을 제외한 3당에게서 뚜렷한 정체성과 정책적 실천의지를 좀처럼 발견하기 어렵다. 화쟁의 가능성을 찾기 힘드니,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래도 정치세력들이 대오각성하고 화쟁을 통한 정치 발전을 이뤄서, 우리가 가끔은 대한민국이 살만한 나라라고 느낄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