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복순 윤약국약사

추운 날씨를 비웃기라도 하듯 딸네 일곱 식구가 보무도 당당하게 도착했다. 오랜만이라 손자 손녀들이 할아버지 할머니 많이 보고 싶었다고 품속으로 파고든다. 10월 중순부터 한 번 내려오길 기다렸는데 이제 온 것이다. 딸이 복직을 해 3학년 담임을 맡아 시간내기가 쉽지 않다.

스트레스 많이 받는 딸을 위해 오늘은 박경리 선생의 토지여행이다. 토지문학관을 치니 강원도 원주만 나온다. 그럴 리가 없는데. 구례군 토지면을 치고 일단 출발했다. 어찌 구례군은 토지에 관한 홍보를 하지 않을까. 담당자를 만나면 한 마디 해줘야겠다고 맘먹고 의기양양하다.

토지면 소재지에 도착해 관광안내도를 찾아봐도, 동네사람에게 물어도 토지문학관은 다 모른다.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지리산 산골에 그나마 너른 들판, 그 들판에 부부송이 서있고, 어쩌고 한 것은 다 뭐란 말인가.

딸이 어느새 검색을 했는지 주변에 어류생태관이 있으니 그곳부터 구경을 하자고 한다. 꿩 대신 닭이다. 입장권을 사려는데 문이 닫혀있다. 오늘 일 안 되는 날이구나 하고 돌아서려는데 젊은이가 나오더니 보수중이라서 반대편 쪽 관만 구경할 수 있다고 한다. 무료란다.

그 직원도 토지문학관은 모른다. 서희네 집에 가려고 한다고 하니 “제가 어떻게 서희네 집까지 알겠어요.” 한다. 최참판댁은 생각이 나지 않고 토지의 주인공인 서희가 불쑥 튀어나온 것이다.

생태관에는 섬진강에 살고 있는 다양한 어류들이 있다. 손자손녀들이 신났다. 네 살짜리 쌍둥이들도 많은 물고기에 손뼉을 치며 좋아한다. 그곳을 나오다 최참판댁이 떠올랐다. 직원이 그곳은 하동 악양면의 평사리라며 꼼꼼하게 설명을 해준다. 그놈의 평사리는 생각이 나지 않고 토지면만 머릿속에서 빙빙 돌았을까. ‘애고, 나도 이제 다 됐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셋째가(8살) “할머니 그 집에는 왜 가요?” 하고 묻는다. 남편이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내 불편한 심기를 돌려보려 했는지 “할아버지 친구네집이야.” 한다. “친구가 초대했어요?” “응” 이렇게 시작되었다.

평사리까지 가는 길은 섬진강변을 따라 구불구불하다. 구례까지는 고속도로였는데. 생태관을 둘러보느라 시간도 꽤 흘렀다. 점심부터 먹기로 했다. 애들에겐 짜장면이 최고다. 악양면은 처음이다. 면소재지에서 중국집을 찾아들어갔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친구가 초대했는데 그 집에서 점심 안 줘요?” 첫째(12살)가 묻는다.

“할아버지 할머니만 초대했는데 너희들까지 다 와서, 번잡해 먹고 가려고. 그리고 너희들이 짜장면 좋아하잖아.”

“할아버지 친구도 할머니랑 둘이 살아요?”

“돌아가셨어.” 박경리 선생을 생각하며 무심히 나온 말이다.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초대를 해요?” 열두 살에게는 거짓말이 빈틈을 보이기 시작했다.

“친구 아들이 초대한 거야. 저의 아버지하고 아주 친하게 지냈으니까.”

“방에도 들어가요?” 둘째(9살)가 묻는다.

“밖에서만 얘기할거야. 그곳은 많은 사람들이 오니까 뛰어다니거나 큰 소리로 얘기하면 안 돼.”

“할아버지만 초대한 것 아니어요?”

주문한 탕수육과 짜장면이 나왔다. 먹는 재미에 빠져 애들의 취조(?)가 멈췄다. 남편은 애들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려 지난 번 여행 갔던 보길도 공룡알해변 얘기를 꺼낸다.

겨울 해는 짧아 서둘러 최참판댁으로 향했다. 입장료가 있다. 돈에 관심이 많은 둘째가 할아버지 윤아 현아 것은 사지 마세요. 36개월부터라고 쓰여 있어요. 다자녀는 할인을 하는지 애들은 두 명만 받는다.

“초대해 놓고 표를 사라고 해요?” 첫째가 묻는다. 점심시간으로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할아버지 할머니만 초대해서 너희 식구들 것만 샀어”

하며 티켓을 보여줬다. 남편과 나는 경로우대자다.

딸이 학생들 수학여행 데리고 갈 때 와봤던 곳이라며 남원인줄 알았단다. 나는 한 술 더 떠 그곳은 ‘최명희 혼불 문학관’이라고 하니 그런데는 가지 않았다고 한다. 수학여행 인솔자로 오면 온 신경이 학생들에게 있어 여행이 아니라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단다.

남편과 나는 토지를 재미있게 읽고 TV로도 본 세대고, 딸과 사위는 박경리 선생의 토지가 유명한 줄은 알지만 읽지도 보지도 않은 세대다.

최참판댁을 둘러보다 “친구 아들이 할아버지한테 왜 인사하러 안 와요?” 셋째가 묻는다. 첫째는 할아버지가 거짓말하는 것을 아는 눈친데, 둘째 셋째는 아직도 할아버지 말을 믿는 것 같다.

“사람이 많으니까 바빠서. 통화만 했어.”

“안 바쁠 때 다시 초대한대요?”

“아니, 한 번 와봤으니까 안 해도 된다고 했어.”

사랑채 툇마루에 앉아 확 트인 평사리의 들판을 바라보고 있는데 한복을 입은 관리인(?) 아니 문화해설가가 나타났다. 둘째가 방안에 진짜 사람이 앉아서 책을 읽고 있다고 했다. 나는 방안은 보지도 않고 바로 마루로 올라섰기에 “아니야 마네킹일걸” 했는데 그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이 애기가 신기해해서” 하며 그 분이 둘째 손을 잡아 준다. 손자 손녀 다섯 명을 쭉 세워놓고 인사를 시켰다. 남편도 나도 딸도 사위도 감사를 표했다. 애기들이 많아서 인지 그분이 흐뭇한 얼굴로 마주해준다.

그 분이 방으로 들어가자, “친구 아들이 할아버지랑 나이가 비슷한 것 같아요” 둘째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아들이 아니라 할아버지 친구 아니어요?” 셋째까지 의심을 한다. 이럴 줄 알았으면 친구를 살려놓고 친구가 초대한 걸로 했어야 하는데.

이실직고해야 할 때가 왔다. 박경리문학관 앞에 세워진 선생의 동상 앞에서 토지의 큰 줄거리를 얘기해 주었다. 아직은 어려서 이해를 못하지만 손자손녀들이 중학생이 되어 수학여행 길에 이곳에 들르게 된다면 “아! 할아버지 친구네집” 하며 미소를 짓지 않을까. 그리고 토지도 읽게 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