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복순 윤약국약사

아들이 저의 장인 장모를 모시고 포도밭으로 왔다. 추석명절이 빨라 추석 전에 보낸 포도맛이 최고가 아니어서 시간 내어 같이 내려오라고 했다. 진즉부터 사돈 내외를 모시고 식사도 하고 전라도구경도 시켜드리려 했는데 시간이 맞지 않았다.

미리 밭에 나가 사돈댁에 보낼 포도를 준비하려다 그분들이 직접 포도를 따고 포장도 하는 체험을 같이 하고 싶어 기다리고 있었다.

사부인이 이렇게 포도밭에 들어와 보기는 처음이라면서 소녀같이 포도 사진을 찍더니, 포도송이를 든 자신의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한다. 나보고 같이 찍자고 부른다. 며느리가 찍어주겠다며 따라 붙었다.

안사돈은 호기심 많은 어린아이 마냥 모두 다 잘 익은 것 같은데 어느 것을 따면 되냐고 묻는다. 나도 모른다. 나는 머리 쓰기 싫어 박스나 접고 포장해 놓은 포도상자를 한 곳에 모아두는 일이나 거든다. 아들이나 며느리도 마찬가지다.

사돈은 당신 딸이 일을 못해서 걱정이란다. 나는 다르다. 일 잘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성격 좋은 것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포도밭 일 해주려고 결혼한 것 아니니까 식구들과 화목하게 잘 지내면 된다고 했다.

트렁크에 포도를 실으려니 이것저것을 내놓는다. 굴비박스와 참기름, 아이스백에 든 김치까지. 시골에 사는 내가 참깨 좋은 것을 아는 사람을 통해 구입해서 단골 방앗간에서 기름을 짜, 서울에 사는 사돈댁에 보내는 것이 우리나라 정서에 맞다. 그런데 나는 거꾸로 받는다.

살림 못한다고 소문이 나, 봄이면 사부인이 고추장을 담았다고 아들 며느리 편에 보내준다. 이런 판에 참기름까지. 손이 부끄러워 얼굴을 못 들겠다.

백 번 양보해 참기름도 기름집에서 짜니 조금 덜 미안하다. 그러나 김치는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가. 김치통으로 가득하다. 이만하면 앞김치로 충분하겠다. 몸 둘 바를 몰라 하는 나에게 매 번 보내주는 영양제는 잘 먹고 있다며 오히려 나보고 고맙다고 한다. 아들 집에 줄 것 까지 했다니 며칠은 고생했을 것이다.

염치는 체면을 생각하거나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마음 자세란다. 염치는 내 것과 남의 것을 분별하는 데서 생긴다. 염치, 이 두 글자를 평생 가슴에 새기고 살면 어디를 가든 사람답게 살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리라. 그런데 나는 이런 염치가 없다. 사부인 앞에서 오늘 더욱 그렇다.

포도를 싣고, 남편과 바깥사돈이 개밥을 주러갔다. 그 사이 화단에서 풀을 뽑고 있는데 사부인이 내 주머니에 봉투를 넣어준다. 농사가 얼마나 힘 드는데 해마다 농사지어 당신들한테 다 보내줘서, 마음먹고 내려왔단다. 여름 내내 흘린 땀이 얼마냐며 돈도 드리고 맛있는 것도 같이 먹으려고 왔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에 이런 법은 없다며, 아니 세상 어디에도 없으니 어서 도로 넣으시라고 사양했다.

사돈지간은 어렵고 조심스런 관계이지만 서로 자식을 나눠가졌으니 긴밀한 협조가 이루어져야할 아주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의 건강을 염려해 주고, 그 집안이 안녕하기를 기원하고, 혈육같이 지내고 싶은 마음이 있다.

점심을 먹으러 갔다. 어려운 걸음을 하셨으니 그 분들이 좋아하는 것을 사 드리고 싶었다. 며느리에게 물어보니 회를 좋아한단다. 바다가 훤히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는 아들 며느리, 그들은 딸 사위와 함께하는 식사시간이니 기분이 좋다. 사돈지간이 참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가끔씩 우리도 서울에 올라가 이런 시간을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밥값을 계산하러 내가 먼저 나왔다. 이미 계산이 되었단다. 언제? 방을 잡을 때 며느리와 안사돈이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해 그런 줄만 알았는데 그때 계산한 모양이다. 이렇게 염치없을 때가 있나.

“사부인, 서울 올라가서 우리가 밥값 계산했다면 기분 어떻겠어요?”
“포도값도 드리고 농사짓느라 고생 많으셔서 밥도 사드리려고 마음먹고 왔는데 한 가지는 하고 가야지요.” 아들이 사돈댁 가까이에 살아서 여러모로 마음이 놓인다. 이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을 해 주는데 이렇게 밥까지 사 주시니 내가 한없이 작아진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자기의 명예와 인격에 손상을 입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은 부끄러움이 무엇인지를 잘 아는 염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염치는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첫 번째 덕목이고 아름다운 사회를 만드는데 가장 기초적인 양심이다. 염치를 안다는 것은 스스로 존중할 줄 아는 자존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이 내 몸을 조이는 것 같다.

아무래도 그냥 말 수 없어 사부인 스카프나 하나 살까 하고 막 나가려는데, 며느리가 저희 친정에서 저녁 먹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며 전화를 했다. 너희 엄마는 무슨 색 좋아하냐고 묻다가, 아니다 네가 엄마 모시고 나가 이 가을에 어울릴 스카프 하나 사드리라고 했다.
내일 아들 통장에 돈을 넣어야겠다. 이렇게 살면 내가 너무 염치없이 사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