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익산시민 유 성 무
가끔 나는 나의 정치적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생각할수록 개념도 불분명한 진보와 보수라는 이분법적 구분으로 규정될 수 없는 정치적 정체성을 갖고 있다고 느껴진다. 살아오면서 맞닥치는 의제별로 정치적 입장이 달랐다. 그렇다고 소위 말하는 중도도 아니다. 나는 다만 모든 사람이 민주주의 원칙에 의거하여 더불어 살아갈만한 정의롭고 상식적인 세상을 원할 뿐이다. 진보와 보수라는 정치적 정체성 구분에 대한 나의 이런 감정을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도 갖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50년을 넘게 살면서 지금까지 모든 정치적 의제에 대해 보수와 진보라는 틀로 일관된 입장을 가진 사람을 보지 못했다. 다만 자신의 상황과 양심에 따라서 주요한 의제별로 정치적 태도와 접근방법이 달라지는 것만을 보아왔을 뿐이다. 사람은 매사에 일관되게 진보와 보수의 입장을 가질 수 없는 존재다. 진보와 보수는 이분법적 구분의 편리성 때문에 아마도 정치인과 언론이 만들어낸 실체 없는 개념이라고 보인다. 백 번을 양보해서 모든 사람에게는 어느 정도 방향이 설정된 진보와 보수라는 정치적 성향이 있다고 인정해보자. 사람의 정치적 성향을 이렇게 양분하려면 사회적으로 합의된 개념이 요구된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정치적 성향을 양분하면 사람들의 인식을 조작하게 되며, 이로 인한 사회적 분열을 조장할 수 있다. 즉 자신도 모르게 불분명한 개념적 틀과 그릇된 방법론에 동조함으로써 입장이 다른 사람들을 적대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명확한 기준 설정이 필요하다. 이런 주제를 꺼내는 이유는 대통령 선거를 앞둔 우리사회에서 정치적 성향의 양분에 따른 폐해가 너무도 크기 때문이다. 진보와 보수를 구분하는 기준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국민의 정치적 선택 기준을 장기적이고 합리적인 정책을 통한 국가의 미래 설계가 아니라 소아적(小我的)인 감정 대결로 변질시킨다. 그 과정에서 극소수 기득권층의 이익만 커질 뿐 국익과 절대 다수 국민의 삶은 뒤편으로 밀려난다. 대한민국에서 진보와 보수는 정치적 이념 구분이 아니라 정치꾼들이 편을 가르기 위한 구호이며, 정치 발전의 걸림돌일 뿐이다. 정치의 목적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회를 보다 정의로운 방향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한 뚜렷한 가치관과 구체적인 방법론의 차이가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기준이 돼야 한다. 진보와 보수는 옳고 그름의 차이가 아니라 가치관과 방법론에 대한 차이가 돼야 한다. 진보와 보수는 대체적 개념이 아니라 보완적 개념이다. 또한 진보와 보수는 부단한 개혁을 담보해야만 하며, 그렇기 위해서는 사회와 적극적인 소통을 해야만 한다. 개혁의 실천 없는 진보와 보수는 사회와 역사의 발전을 가로막는 수구세력으로서 척결의 대상일 뿐이다. 최근처럼 우리사회 전반에서 정의에 대한 담론이 커졌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박근혜-최순실 일당의 국정농단사태에서 비롯된 탄핵재판과 특검수사를 지켜보면서, 우리는 보수로 위장한 수구세력의 그 끝을 모를 탐욕과 부도덕성에 대해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또한 촛불을 든 국민들의 정의에 대한 열망을 저버리고, 조기 대선 정국에서 정치적 이해타산에 여념 없는 일부 거짓 진보세력의 간교함을 확인했다. 나라가 이 지경에 될 때까지 협조 또는 방조했던 세력들과 정치적 타협을 논의하는 것은 정의 실현을 위해 우선 힘부터 얻겠다는 권도(權道)가 될 수 없다. 정의실현 의지가 없는 이 자들은 진보도 보수도 아닌 수구반동에 다름 아니다. 정의를 요구하는 촛불 국민들에 맞서 애국보수를 표방하면서 박근혜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을 보면서 지금이야말로 우리사회에서 보수와 진보에 대한 개념을 정립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언어는 추상적이지만 사람의 사고와 행위를 구체적으로 지배할 수 있다. 따라서 진보와 보수의 개념에 대해 사회적으로 합의함으로써 정치의 유일한 목적인 정의가 그릇된 정치적 편 가르기에 밀려나는 구태를 청산해야 한다. 우리사회가 언제까지 유치한 말장난에 휘둘리면서 분열과 대립을 거듭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를 위해 먼저 양식 있는 학자들이 정의를 기반으로 하는 진보와 보수에 대한 이론적 틀 제시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이후 사회적 논의를 거쳐 진보와 보수의 개념을 합의할 때, 비로소 우리사회는 목적이 방법에 매몰되는 우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 또 언제 이런 거대담론을 할 수 있겠는가? 차제에 벌어질 대선 정국에서 우리사회가 허무맹랑한 공약(空約)과 이념적 편 가르기에 현혹되지 말고, 정의 실현의 방편으로써 진보와 보수의 개념을 인식하고 보다 나은 정권을 선택하는 계기를 만들기 바란다. 어찌 이 땅에서 또 다시 거짓된 이념의 탈을 쓰고 국민들을 우롱하면서 나라를 분탕질하도록 할 수 있겠는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