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복순 윤약국약사

일요일이다. 햇빛이 난다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고 어지간한 것은 모두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일요일 날씨가 좋으면 복권에라도 당첨된 듯 행복하다. 주중엔 실내에만 있으니 일요일 하루에 일주일치 햇빛을 받아야 된다.

벌써 농사일이 시작되어 주일마다 밭에 간다. 지지난주는 딸네와 보길도여행으로, 지난주는 서울 아들네 집에 다녀와 삼주 만에 밭에 갔다. 자잘했던 풀들이 너풀너풀한다. 게으른 눈이 미리 겁을 먹어 언제 다 뽑을까 걱정이 앞선다.

막상 뽑기 시작하면 재미있다. 아직은 어려서 잘 뽑아지고 반 하우스라서 춥지 않고 무엇보다 온몸으로 햇빛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좋다. 다 뽑았을 때의 개운함은 큰 성취감을 맛보게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복잡했던 생각들은 풀이 뽑아지듯 머릿속에서 마음속에서 뽑아졌는지 나도 모르는 사이 풀들과 얘기를 하고 있다. 풀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 겨우내 추위를 이겨내고 겨우 살만하니까 이렇게 뽑혀야하는 풀의 삶이 안타깝다는 마음에 잠시 고개를 숙인다.

퇴비를 주고 며칠 전에는 물까지 주어 풀들에게는 최상의 조건이었다. 살다보니 이런 횡재할 때도 있구나 싶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데 그날이 며칠 되지 않아 미안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생의 기쁨을 알고 죽는 것과 삶은 고생이고 춥고 목마른 세상인 줄만 알고 죽는 풀과는 전적으로 다를 것이다.

포도밭의 풀들에게 “너희들은 행복한 줄 알아라. 삶의 환희를 맛보지 않았느냐, 평생을 살아도 이런 맛 한 번 못보고 박토에서 죽는 풀들도 많단다.” 라고 말을 건넨다. “이런 맛 조금만 더 보면 안돼요?” 앙탈을 부리는 풀들도 있어 잘 뽑히지 않는다.

독새기풀이 인사를 한다. “주인마님 우리들 뽑으려고 겨울 내내 몸 관리 잘 하셨어요?” 아침마다 공원으로 운동을 나가고 규칙적인 생활을 했지만 나이 앞에 장사 없다고 너희들이 나 좀 봐주면 안 되겠냐고 협상을 시도해 봤다. 풀들은 나이도 안 먹는다.

풀 중에서 뚝새풀이 제일 지랄이다. 몇 형제가 한 가족을 이루고 뿌리는 여러 겹의 실뿌리로 넓적하게 뻗어 호미로 몇 등분을 해서 뽑는다. 그 중 한 가닥의 뿌리만 남아도 어느새 바로 새 가족을 만든다.

괭이부리말도 2등가라면 서운해 한다. 무더기무더기 한 마을을 이루어 놓고는 이만하면 가문의 영광이 아니겠냐고 약을 올린다. 그래 이웃 마을까지 불러서 잔치도 했냐고 물었다.

매 주 와서 우리들 뽑는 것이 마님의 일이듯 저희들은 어떻게든 종족을 번식시키고 또 살아남는 것이 저희들의 일이니 너무 탓하지 말라고 한다. 그렇다 각자 자기들의 할일을 하며 살아간다. 내 감히 세상의 이치 앞에 무슨 불평불만을 하리오.

3월이 되어도 포도밭에 풀 한 포기 나지 않는다고 해보자. 삭막하니 땅이 죽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풀들이 돋아나 아는 체를 하고 겨울에도 끄떡없이 밭 잘 지키고 살아 숨 쉬게 하고 이렇게 파릇파릇함을 보여주지 않느냐고 말을 하는 것 같다. \무슨 일이든 시작하기 전이 걱정스럽다. 벗어 붙이고 해보면 별 것도 아니고 또 나름대로 요령도 생겨 진도가 나가기 마련이다. 밭매기도 마찬가지다. 묵은 것이 아닌 햇것들과 놀아서인지 몸도 가볍다. 포도밭의 풀이 아니면 매 봄 뉘라서 내게 새 것을, 이 야들야들한 생명체를 만지게 해 줄까.

풀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점심시간이 지나는 줄도 모른다. 그 만큼 재미가 있다는 뜻이다. 나이 먹으면서 언제 이토록 한 가지 일에 푹 빠져 본 적이 있던가. 책을 읽는 것도 집중이 잘 되지 않아, 눈이 아파 한 시간 이상 못 읽는다. 요즘 틈틈이 성경을 쓰는데 그것도 마찬가지다. 그러고 보면 밭 매는 것이 그나마 내 적성에 제일 맞는가 보다.

햇볕이 있고 흙이고 새 생명이 있는 밭이다. 온 몸에 새 피가 돌고 녹색의 뿌리가 내리는 것 같다. 농사 초창기시절 농사는 풀과의 전쟁이라며 풀을 내 적수로 보았다. 그래서 이놈의 풀 이놈의 풀 하면서 뽑았다. 그런데 언제 부턴가 이 풀들에게도 생명이 보이기 시작했다.

생태계 먹이사슬의 가장 기본이 풀이다. 그래서 나도 존재하는 것이다. 포도밭의 풀들과 공생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 중이다. 밭둑이나 자투리땅엔 풀이 숲을 이룬다. 이 풀들을 없애지 않는 한 포도밭의 풀도 줄어들지 않는다. 이 풀씨들이 날려 포도밭으로 다 들어온다.

그래도 밭둑과 자투리땅에 풀 약을 치고 싶지 않다. 이 봄날 온몸으로 햇빛을 받으며 풀들과 지난겨울을 이야기하며 밭을 맬 수 있다는 것이, 황폐하게 야위어 가는 내게 감성을 부풀려 준다. 또 어린 날 언제나 밭에 계시던 어머니를 돌아보게 해 강인함과 근면을 다짐하게 한다.

한 고랑을 다 뽑고 바라보면 깨끗하게 정돈된 모습이 내 마음과 몸까지 정화된 기분을 맛보게 한다. 그 많은 풀도 결국은 다 뽑지 않았느냐,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얻는다. 일요일 밭매기는 일주일의 실내생활을 버티게 해 주는 원동력이다.

풀 뽑기가 아니면 그리 이른 봄날부터 매 일요일마다 밭에 가지 않아도 된다. 농사꾼은 놀더라도 밭에서 놀아야 한다. 한 번 휘 둘러보고 올 포도밭인데 풀 때문에 하루 종일 있게 된다. 그래서 포도나무와도 더 친하게 된다. 농사는 주인 발자국 소리 듣고 잘 자란다고 하지 않던가.

일요일 비만 오지 말라고 그리고 햇빛이 쨍 나라고 기도한다. 온몸에 햇빛을 받으며 하나하나 풀을 뽑는 것은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일종의 나의 수행법이다. 일요일이 기다려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