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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

윤복순 윤약국약사

花樣年華 -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이다. 꽃처럼 아름다운 시절이라면 흔히들 젊은 시절을 생각한다. 빛나던 여고생, 대학생이 되었다고 뽐내던 때, 돈을 벌기 시작한 사회 초년병, 신혼생활, 임신과 출산 모두가 화양연화다.

가끔 한 번씩 소소한 상비약을 사가던 젊은 애기엄마가 모처럼 많은 돈을 세더니 부탁을 드리고 싶다고 했다. 오후에 떡집에서 떡을 가지고 올 텐데 돈도 주고 떡도 받아줄 수 있겠냐고 한다. 동네약국이다 보니 이런 것쯤은 그야말로 누워서 떡먹기이다.

착불로 택배가 왔으니 돈도 주고 물건도 받아달라는, 애기 좀 택시 태워 보내주라는, 물건을 잠깐 맡기겠다는, 전화를 해 달라는, 우산을 빌려달라는 이런저런 부탁을 받는다. 이런 일들이 귀찮지 않을 뿐 아니라 사람 살아가는 맛 같아 은근히 즐기고 있다.

저녁때쯤 떡을 네 상자나 가지고 왔다. 의자 한 쪽을 다 차지한다. 아침에 돈을 주고 간 애기엄마가 오지 않고 다른 사람이 떡을 찾으러 왔다. 한 상자만 가져간단다. 고맙다고 나에게 조금 덜어주고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사람이 와서 한 상자 가져가며 또 준다.

이미 한 사람에게 받았다며 보여주니 그것은 그것이고 자기는 자기대로 주고 싶으니 받으란다. 이렇게 네 사람이 주고 갔다. 애기엄마 빼고는 다 모르는 사람이다. 친구들인데 그 떡집 떡이 맛있다고 해서 한 말 맞춰 나누는 것이란다.

얻은 사람이 더 많다고 정말 내 몫이 반말은 될 것 같다. 교회에서 무슨 행사가 있었다고, 상가에서 개업을 했다고, 무슨 모임에서 얻었다고, 쑥 뜯어다 절편을 했다고 종종 사람들이 떡을 줘서 냉동실에 떡이 떨어지지 않지만 이렇게 많은 양은 처음이다.

떡 먹으러 오라고 이리저리 전화를 했다. 여러 사람이 먹었고 동네 성(兄)이 맛있다고 해 싸 드리기도 했다. 원래 얻어먹는 것이 맛있다. 성이 우리도 이런 떡 해 먹자고 하는데 떡 이름도 모르고 떡집도 몰라 애기엄마 오기만 눈이 빠지게 기다려도 종무소식이다.

고명이 흰색이라서 돔부 껍질을 벗겨서 만들었을까 짐작만 했다. 살림 잘하는 아주머니에게 물으니 기피인절미라고, 팥의 껍질을 벗겨 고물을 만든 것이라고, 원래는 껍질을 벗겼다고 해서 거피떡인데 흔히들 기피떡이라 한다고 알려준다.

시간이 지났고 성이 심심할 만하면 그 떡이 맛있다고 그 사람 지금도 안 왔냐고 묻곤 했다. 그날도 친하게 지내는 특히 떡을 예쁘게 만드는 P아주머니가 있을 때 기피인절미 얘기가 나왔다. 언젠가 그녀가 쑥개떡을 쪄 왔는데 꽃모양, 새 모양 등으로 작품을 만들어 접시에 담았는데 너무 예뻐서 먹을 수가 없었다. P가 맞춰 오겠다고 했다.

맨 날 성한테 받기만 해서 떡값은 내가 내야겠다고 맘먹고 있는데 P가 무슨 소리냐고 절대 돈을 받지 않는다. 당신 용돈 다 들어갔을 텐데.

쌀은 농사지은 것이니 걱정 말란다. 셋이서 똑같이 나눴다는데 정말 많다. 박스로 받으니 더 많은 것 같다. 조금씩 담아서 냉동실에 넣어뒀다 하나씩 꺼내 먹으란다. 열 봉지나 됐다. 동네사람들과 한 봉지씩 나누다 보니 정작 내 몫은 두 봉지다.

P에게 밥이나 사려고 성이랑 셋이서 아귀찜 집으로 갔는데 하필 그 집의 수도가 말썽을 부려 영업을 못한단다. 시골밥상으로 갔다. 약소하다.

딸네 집에 가느라 종교생활 하느라 그들이 바빠 겨우 3월에 날을 잡아 원래 가자고 했던 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맛있는 것을 좋은 사람들과 먹으니 행복하다.

배가 불러 소화도 시킬 겸 걸어오는데 길거리에 미나리, 쪽파, 쑥, 머위 등 봄나물이 벌써 많이 나와 있다. 봄나들이 나온 기분이다. 해찰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봄을 맞는 마음은 똑같은가 보다. 성이 너는 어서 가서 돈이나 벌란다. 당신들은 잠깐 어딜 다녀오겠단다.

농산물 직거래장에서 미나리 세 단을 샀다고 한 다발을 준다. 나는 이렇게 많이 사 본적이 없다. 어떻게 다 먹을까? 또 나눠 먹어야 하나? 미나리김치를 담그란다. 지금까지 해 본 적이 없는데.

알려준 대로 대충했는데 맛있다. 어, 나도 요리 잘 하네. 아니 나이를 먹으면 자연스레 잘 하게 되나? 한 수 더 떠 이파리로는 부침개를 부쳤다. 아삭아삭 씹히는 김치와 입안에 미나리향이 가득 퍼지는 부침개, 요리 잘 한 기분 꽤 괜찮다.

아침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출근을 한다. 오늘은 무슨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까 기대감으로 들뜬다. 원래는 올 해까지만 약국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막상 그 나이가 되어보니 일을 그만 두기엔 너무 젊다.

내 나이의 다른 사람들은 거의 퇴직을 했다. 나는 아직은 건강해서 일할 만하고, 늦은 시간까지 약국 문을 열어 동네사람들에게도 좋은 평을 듣고, 문전 약국들이 일찍 문을 닫아 간단한 상비약은 편의점에 줘야한다고 야단인데 나라도 동네약국을 지키고 있어 나름대로 명분도 있다. 여러 사람들을 만나 생활의 지혜도 얻고 정도 나누고, 나이든 사람들의 사랑방 역할도 한다. 무엇보다 집에서는 잘 되지 않는 글쓰기와 책읽기도 약국에서는 할 수 있어 만족한다.

명분과 실리뿐 아니라 만족까지 있다면 지금의 이 생활도 젊은 날 못지않은 화양연화가 아닐 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