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한국예총 익산시회장

김영규

5,000년의 긴 역사를 간직한 우리 한국인은 나이에 대하여 민감하고 집착이 강하지 않나 싶다.

몇몇이 처음 만난 자리에서도 서로의 나이를 묻는 게 어색하지 않고, 나이에 따라서 호칭과 존대 여부 등을 즉석에서 결정, 서열을 정리한다. 국가와 사람의 나이뿐만 아니라 도시의 나이, 건축물의 나이 등 심지어는 우리나라의 경제 나이는 51세로서 이제는 서서히 늙어가고 있어서 10년 후면 환갑을 넘어 중늙은이가 되는 셈이라고 말한다.

장래가 창창하던 젊은이처럼 발전만을 거듭하던 한국경제가 어쩌다 중늙은이 신세가 됐느냐고 한탄만 할 노릇은 아니다. 경제는 순환하고 주위 환경은 새롭게 재생 하기에 회춘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고 희망도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익산이라는 도시와 비교하기 조차도 어려운 아주 오래된 서양의 도시들 , 소위 런던이나 파리, 프랑크푸르트 등의 원도심은 2,000여년전 로마의 군단 주둔지로 시작해 도시가 확장 발전하면서 오늘에 이르렀으니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 장구한 역사를 자랑스럽게 전하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에 지어진 계획도시는 군사 방어를 목적으로 하는 도시 이외에는 모두 평지에 세워졌다. 이와 같은 기하 도형은 인간의 이성에서 먼저 생각되는 형상이어서 르네상스인들은 땅을 보기전에 먼저 도시의 형상에 대한 구상을 마쳤으며 이를 실현하기 위한 땅은 백지 같은 지형이어야 했다.

현대에 들어와서도 평지에 도시건설은 변하지 않는 전통이었으니, 우리 익산의 여건과 대동소이하지 않았나 싶다. 20세기의 시대정신으로 나타난 모더니즘의 건축가들은 도시를 노동과 교통, 주거와 휴식이라는 큰 분류로 나누고 주거지역, 상업지역, 공업지역 등의 용도로 평면 분할하는 도시계획도를 만들었다. 산업과 경제가 정치와 종교를 대체하는 권력으로 떠오른 이 계획은 20세기 모든 신도시들의 교본이 됐으며, 기능과 효율이 최고의 가치로 빠른 동선, 빈틈없는 공간 활용이 계획 기준이었고 평지를 신도시의 대상지로 선택하는 일은 당연한 우선순위였다.

도시 인구의 폭발적 증가와 함께 수없이 많은 신도시들이 이렇게 만들어졌다. 이후 환경파괴, 도시오염, 빈부격차 도시범죄 등이 폭증하자 많은 도시학자들은 이 계급적이고 계랑적 신도시들을 부정적으로 비탄했다.

그 후 인간들은 땅과는 무관한 도시만들기의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한다. 하늘을 배경으로 아니면 황폐한 땅위에 거대한 기계나 공장처럼, 땅의 조건과는 관련 없는 완벽한 인공구조물을 만들려 했으니 아마도 두바이가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나라 대통령과 자치단체장들이 벤치마킹했던 도시, 야자수 모양의 인공섬, 구름 모양의 환상적 도시구조, 바람이 불면 흔적 없이 사라질 사막 위의 신기루 같은 우리가 본받을 수 없는 곳이다.

그러나 지난 시대에 우리는 서양화가 근대화인 줄 착각, 서양식 도시를 흉내내고자 서양에서 이미 폐기된 마스터플랜을 들여와 국토의 70%가 산으로 이루어진 우리 국토에 엄청난 토목공사들 일으키며 신기루 같은 신도시가 이곳저곳에 나타났다. 이른바 모든 터에 새겨진 무늬를 모조리 없애버린 터무니없는 도시, 즉 터무니없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든 것이다.

대동여지도에 나타난 우리의 산천은 산과 계곡이 있고 물길과 양지바른 터들이 아름다운 무늬처럼 새겨져 있다. 이 터에 새겨진 무늬가 바로 터무늬이니 이 단어는 우리의 존재와 삶의 근본이 모두 터에 있다고 믿는 우리 선군들의 관념적인 언어였다.

모든 땅은 고유하며, 특징과 개성이 있고 위로와 경도가 각기 다르듯이, 땅마다 자연이 새긴 무늬가 다르고 그 위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무게의 무늬도 달라, 모든 땅은 각기 다른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이제 우리의 땅, 익산의 땅은 그 스스로 어떤 건축이 되고 싶어 하고 어떤 도시가 되어야 하는지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터무니없는 일이 종종 일어나기도 하지만 이제는 이 땅이 하는 이야기를 스스로 들을 수 있는 , 그리고 그 터가 가진 무늬에 대한 새로운 무늬를 덧대어, 터무니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