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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약

윤복순 윤약국약사

연일 한여름을 방불케 하는 더위다. 폭염주의보까지 내리기도 한다. 이 더위에 밭에서 일을 하는 남편이다. 포도 알 솎기는 시간을 다투는 일이라서 아침저녁 선선할 때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일꾼이 매일 스무 명 정도 된다.

때 이른 더위로, 아주머니들이 알 솎기를 실수해서, 진도가 생각처럼 나가지 않아 남편이 스트레스를 받는다. 포도 알이 작을 때는 알 솎기가 수월하지만 알이 커지면 속이 꽉 차서 가위가 잘 들어가지 않을 뿐 아니라 억지로 넣다 보니 알에 상처를 입힌다.

날이 더워 포도는 한 시간이 다르게 자라는 것 같다. 포도 알이 커져 하루면 끝낼 일이 삼일 걸린다. 남편 애타는 것을 알기에 아들딸이 농사 안 지으면 안 되냐는 말을 안 할 수가 없다.

농사 져서 먹고사는 것 아니니 몸 생각해서 무리하지 말라는 내게, 눈으로 보지 않으니 그런 한가한 소리가 나온다고 면박을 준다. 나이 먹으면서 건강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다고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지 모르겠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면서 퇴근하는 남편의 눈치를 보게 된다.

남편 휴대폰에 손자 손녀들의 사진과 동영상을 딸과 며느리가 보낸다. 내가 휴대폰이 없어 같이 볼 수 있는 저녁시간에 보내는데 어느 날부터 낮에 보내기 시작한다.

“더위에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 오늘도 롱데이(long day)입니까?” 남편이 기분 좋아 나에게 위로를 해준다. 휴대폰을 꺼내더니 빨리 오란다. 씻기부터 하라고 하니 샤워보다 더 상큼한 것이 있단다.

딸네 애들 다섯 명이 ‘무조건’이란 노래를 틀어 놓고 율동을 하는 모습이다. 쌍둥이들이 언니 오빠가 하는 것을 따라 하는데 한 두 박자 늦게 하고 그 모습도 엉성해 보는 내내 재미있어 피로를 잊게 했다.

한쪽 팔을 쭉 올리고 머리를 뒤로 젖히고 있다가 음악에 맞춰 시작을 하는데 쌍둥이들은 시작하면 손을 올린다. 큰 애들이 앉았다 일어서면 그때서야 앉고, 뒤로 돌았다 다시 앞을 볼 때 쌍둥이들은 그제야 뒤로 돈다. 뿐만 아니라 윤아가 앉았다 빨리 일어서지 않아 현아가 일으켜 주기도 한다. 초등학생인 위 셋은 아이돌 못지않은 기량을 뽐내 박수가 절로 나온다.

딸이 육아휴직 중인데 이렇게 다 가르친 모양이다. 딸이 보내준 피로회복제 덕분에 남편이 이 더위에도 지치지 않고 오히려 실내에서 근무하는 나를 위로해 준다. 좋은 노래도 한두 번이라는데 애기들은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고 걱정이 사라지고 기분이 좋아져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노래가 길어 유희의 동작도 여러 가지인데 어떻게 다 외웠는지 모르겠다. 7월 딸의 시어머니 생신 식사 때 위문공연을 할 거란다. 그 연습장면을 찍어 보낸 것이다. 참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들이다.

쌍둥이들이 어느새 집 나이로 네 살이다. 미숙아로 태어나 애도 많이 태우고 낯가림도 심했는데 지금은 말도 잘하고 뽀뽀도 잘 해주고 밥 먹을 때면 하나는 남편 무릎에 또 한 놈은 내 무릎에 떡하니 와서 앉는다. 나는 밥도 못 먹게 ‘고기, 고기’ 하면서 저만 달라고 야단이다. 밥을 잘 먹으니 잘 자라서 지금은 정상으로 태어난 애들과 다름이 없다.

이것들이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춰라.’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춘다. 천사가 따로 없고 천국이 따로 없다. 더위에 농사일에 지친 남편을 위해 딸이 한낮에 보내는 영상이다.

며느리도 육아휴직 중이다. 친손자 손녀는 3월에 돌이 지났다. 아직도 낯가림이 있다. 며느리는 쌍둥이를 키우느라 족저근막염이 생겼고 양팔에 하나씩 보듬어 키워 어깨병도 났다. 겨우 나았는데 무슨 연유인지 엄지발가락에 염증이 생겨 발톱까지 뽑고 지금도 고생 중이다.

이런 안중에도 우리를 위해 애기들 사진을 찍어 보내고 동영상 통화를 하게 한다. 손녀가 리모컨을 귀에 대고 ‘아빠, 아빠’ 하며 무어라 웅얼웅얼하는 모습을, 손자가 할아버지 할머니 안녕하세요? 인사를 한다고 엉덩이를 뒤로 쭉 뺀 모습을, 손가락을 짝 펴고 손목을 돌리며 ‘안녕’ 하는 모습 등을 보낸다.

둘이 나란히 누워 젖병을 물고 있는, 서로 이유식을 떠먹이는, 자박자박 뒤뚱뒤뚱 걷는, 커튼 뒤에 숨어 깍꿍 하는 모습 어느 것 하나 예쁘지 않은 것이 없다.

피붙이라서, 그간 얼굴을 익혀서, 조금 컸다고 얼굴만 마주쳐도 울었는데 요즘은 웃어주기까지는 하는데 내가 보듬으면 운다. 생일이나 지나야 낯가림이 없어지고 할아버지 할머니를 알아볼 수 있을 것 같다. 피가 무엇인지 이것들을 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아기 키우기가 힘들어서 결혼은 해도 아기는 낳지 않겠다는 젊은이들이 많다고 한다. 이 세상에 힘들지 않은 일이 어디 있으랴. 어차피 인생사가 고해인 것을.

내 새끼를 낳아 키우는 일 만큼 보람된 일이 또 있을까. 어떤 고통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의 원천이 자식이데.

딸과 며느리가 한낮에 손자 손녀들의 사진과 동영상을 보내 남편의 피로와 더위를 날려준다. 퇴근길 남편 얼굴에 미소가 있다. 얼른 나에게 보여주고 싶어 온 몸이 땀투성이인데 샤워도 미룬다.

알 솎기가 끝나 포도농사는 한 고비 넘겼다. 일찍 찾아온 더위에도 3개월 넘게 계속된 일에도 지치지 않고 웃으면서 할 수 있었던 것은 일곱 명의 손자 손녀들 덕분이다. 이만한 보약이 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