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한국예총 익산시회장

김영규

일상을 살면서 정신없이 바쁘고 어수선한 가운데 일어나는 일이나 어려운 문제가 생겼을 때 “에라 모르겠다 이판사판이다”라는 말을 쓰기도 하고 듣기도 한다. 이 말은 부정적 측면이 많지만 원래는 불교용어에서 유래된 말이니 아이러니하다.

조선시대 숭유 배불정책에 영향으로 불교는 산속으로 침거하게 되면서 이판승(理判僧)과 사판승(事判僧)으로 구분, 경전이나 참선으로 공부하고 부처님의 진리를 깨우치려는 승려들은 이판승, 속세의 현실에 부응 절살림을 맡아 절을 유지하고 지키는 승려들은 사판승이었던 것이다.

절은 사판승들의 노력으로 살림이 유지되고 반대로 참선과 경전 공부를 하는 이판승들이 있었기에 불교의 정신과 문화가 유지 계승 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수레의 양쪽 바퀴와 같아서 한쪽도 없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존재였으나 학식과 인품을 갖춘 이판승에 비하여 사판승들은 배움이 적고 여러 가지로 힘이 약하였다. 사중(寺中)에서는 양측의 대립이 심하고 서로를 비난하기도 하였다. 절에 중요 문제나 행사가 있을 때는 전 대중이 모여 논의를 하게 되는데 이것이 대중공사(大衆供辭) 또는 대방공사(大房供辭)다. 이것을 줄여 불러 공사판(供辭判)이라고 한다.

이판과 사판이 한 방에 모여 머리를 맞대고 논의를 하고, 대책을 마련하고, 앞일을 설계하는 자리가 바로 “이판사판 공사판”이란 이야기인 것이다.

일견폐허 만견폐실(一犬吠虛 萬犬吠實 )“개 한 마리가 헛것을 보고 마구 짓으니 온 동내 개들도 사실인 줄 알고 덩달아 짖어댄다”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한 마리의 개는 무엇인가? 의심스러우면 무조건 짖게 된다. 그러면 동네 주위의 모든 개는 영문도 모른 체 덩달아 짖어대는 것이 개들의 습성인 것이다.

요즈음 우리 주위에는 무엇을 주었느니 강요했느니 시끄러운 이야기가 밑도 끝도 없이 나돌며 언론들은 풍성한 기사거리로 앞다투어 보도하며 또 다른 시각의 무수한 예측들을 각자의 입맛으로 쏟아내고 있다.

평범하고 성실한 사람들이 사는 우리 사회에 짐승들이 살아가는 방법과 동일한 법칙이 적용된다면, 이것은 잘못되어도 한참이다. 잘못된 일이다. 입이 있는 동네의 모든 입이 어느 것이 사실인 줄도 모른 채 나의 소리가 더 크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 엄청난 크기와 속도로 말 들을 쏟아낸다.

입을 벌려야 할 때 벌리지 말라는 것은 아니지만 짐승과는 다르게 이성적이고 신중한 입을 벌려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경솔한 입 때문에 시끄럽지 않아도 될 조용한 마을 전체가 시끄러워지거나, 누군가는 커다란 상처를 받고 쓰러지게 된다면 그 입은 짐승의 입과 조금도 다른이 없을 것이다.

내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들을 가치 있는 말로 바꿀 수 있는 비결이란 “권력이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함이 아니라 “가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의지일 것이다.

“성공한 사람이 아니라 가치 있는 사람이 되려고 힘써라” 라고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말했다. 가치 있는 행동은 ‘존중’일 것이며 존중이란 나보다는 상대를 귀하게 여기는 ‘섬김’에 있을 것이다.

될 자는 불자는 아니지만 절 앞에서 이십오녀년을 생활하다 보니 어깨 넘어 얻은게 많다. 절에는 대중이 모여 살기에 순서가 매우 중요하게 보인다.

무슨 일이든 차례대로 하게 되는데 이것이 차서라고 한다. 위와 아래가 정해지면 윗자리를 상판(上判) 아랫자리를 하판(下判)이라 부른다. 즉 판(判)이란 일정한 대중이 모여있는 자리를 말한다.

말을 입에 올릴 때는 깊은 성찰과 울림이 묻어나는 말을 해야 할 것이며,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중생들과 자리는 더욱 그러하니 대저 사람이란 정작 사람이 되기가 제일 어렵고 사람이 되어도 사람 노릇하게 더욱 어렵다.

얄팍한 불교 지식으로 장황하게 설명한 불교인들의 지혜로움을 바탕으로 얼굴을 맞대고 공사판을 벌여 상대를 위함이 무엇인지 슬기롭게 대처하고 무더운 여름을 보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