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복순 윤약국약사

먼 데 사는 친구가 찾아오면 반갑지 않은가.(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 이 말이 젊을 때는 마음에 와 닿지 않았는데 지금은 음미할수록 고개가 끄덕여지고 여운이 남는다.

며칠 전 남편의 중학교 친구 둘이 내려왔다. 나와는 대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다. 초등학교 선배들이다. 같은 동네가 아니어서 초등학교 때는 몰랐고 중학교 때 같은 통학기차를 타고 다녔을 텐데 중·고등학교 때도 몰랐다. 대학에 들어가 향우회를 하면서 선배임을 알았고 남편과 친하다는 것도 알았다.

그들은 애들을 잘 키워보겠다는 일념으로 서울로 이사를 했고 아내들은 직장을 그만두고 따라갔다. 맞벌이를 하는 집도 고향에 남은 집도 나뿐이다. 그들이 부모님이 계신 고향에 내려오면 우리를 만나고 올라갔다. 젊었을 때는 남편이 직장생활로 객지를 떠돌았기 때문에 그냥 올라갈 때가 더 많았다. 그러다가 부모님들이 돌아가시고 이제는 고향에 내려올 일도 별로 없는 나이가 되었다.

우리는 퇴직세대이지만 무엇인가 바쁘게들 살고 있다. 아니 남편의 포도밭일 때문에 그들이 쉬 내려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작년에도 이맘때 내려왔었다. 익산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지만 그 당시는 교통이 좋지 않고 정보도 없던 때라 알지 못했던 곳을 구경시켜 주었다.

작년 우리는 함라산 둘레길을 걸었고, 금강 곰개나루를 구경했으며 숭림사에서 가을의 정취를 우리의 나이만큼 나눌 수 있었다. 가을, 해가 진 무렵, 먹을 만큼 먹은 나이, 모두가 우리와 딱 어울리는 것 같았다. 얼마동안을 조그만 사찰 계단에 앉아 있었다. 마음이 평온하고 먼 데서 친구가 맘먹고 찾아와 주니 이만하면 잘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먼 데 사는 친구가 찾아오면 어찌 반갑지 않겠는가. 우리가 건강하게 자주 만나고 만나면 반가운 친구로 오랫동안 지냈으면 좋겠다.” 이런 쪽지를 영양제에 부쳐 돌아가는 그들에게 주면서 나는 참 행복했다. 그들이 환한 얼굴로 받았고 우리는 한참동안 잡은 손을 놓지 못했다.

그들이 가고 난 뒤 고등학교 때 친하게 지냈던 내 친구들을 그려 보았다. 2학년 때 이과 반은 한 학급이었고 여섯 명이 친하게 지냈다. 공부도 열심히 했고 대학도 잘 갔다. 세 명이 S대, E여대, S여대 등 서울로 갔고, 나와 L이 약대에 다른 L이 의대에 진학했다.

대학 다닐 때는 방학이면 만났고 결혼하고는 자주 만나지 못했다. S대를 나온 친구는 미국으로 유학을 갔고 남편이 지방대학 전임강사 자리를 얻어 돌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혼하고 미국으로 갔다는 얘기를 들었다.

의사인 L이 처음엔 애들 공부시킨다고 미국에 갔는데 몇 년 뒤에는 이혼을 했다. 이러면서 우리들의 만남은 소원해졌다. 차츰 전화 횟수도 줄어들었고 남편 모임에 따라다니는 일이 더 많아졌다. 친구들도 아마 나와 같았을 것이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오십이 되던 해 약사인 L의 사망소식을 들었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맥없이 주저앉았다. 오십이란 나이가 이런 나이인줄 몰랐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보다 더 쇼크를 받았다.

이렇게 내 친구와의 모임은 하나하나 무너져 갔다. 그런데 남편은 중학교 때 친구 8명이 그 당시 모임을 만들었고 지금까지 매년 한 두 번씩 모임을 갖고 있다. 그들은 이혼한 가정도 사망한 사람도 없다. 크게 출세한 사람도 가난한 사람도 없다. 그저 평범한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이다.

우리 나이가 그랬듯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렵게어렵게 대학을 졸업하고 개발도상국의 산업화 덕분에 곧바로 취직을 하고 한 푼 한 푼 모아 집을 장만했다. 그리고 애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겠다고 그들이 다 서울로 이사를 갔다. 그런데 지금 그들의 애들이나 고향에 산 우리 애들이나 선남선녀이고, 맞벌이를 한 나의 재무 상태나 그들의 재력이나 도진개긴이다.

8명의 친구 중 작년에 왔던 친구가 올해도 왔다. 작년에 내가 좋았던 만큼 그들도 좋았던 모양이다. 12시쯤 도착할 거라고 했는데 주말이라 길이 막혀 2시가 넘어 도착했다. 배고픔을 참지 못하는 내가 그들과 밥을 같이 먹기 위해 맹물로 허기를 달래며 기다렸다.

나에게 주려고 서울에서부터 사왔다고 소국 한 아름을 안겨줬다. 흰색, 노란색, 보라색, 노랑에 자주색, 항아리에 다뿍 담아 약국에 놓았다. 약국에 오는 손님들이 국화가 참 예쁘다고 좋아하고 나는 또 자랑을 하는 재미가 있다.

남편 친구들과 저녁을 먹고 우리집에서 맥주 한 잔씩 했다. 나는 우리집에서 잤으면 좋겠다고 했고 그들은 불편하다고 여관에 가서 자겠다고 했다. 아무리 어렸을 때 친구이고, 가난함을 같이 겪었고, 현재는 사는 것이 비슷해도, 아침밥은 안 할 거고 나가서 콩나물국밥을 사먹자고 해도, 친구집에서 자는 것은 부담이 되는 모양이다.

내 친구라면 우리집에서 잘까 생각을 하며 오랜만에 고등학교 때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이만저만 남편 친구들은 내려오는데 너도 한 번 내려오지 않겠냐고 물었다. 마흔 살에 낳은 늦둥이가 아직도 진로를 정하지 못해 온 식구가 머리를 싸매고 있단다.

낮의 길이가 짧아지는 만큼 따뜻한 것이 좋고 어릴 때부터 친하게 사귀어온 친구가 그리워지는 가을이다. 이런 때에 덜렁 전화 한 통 하고 먼 데로 찾아갈 막역한 친구가 나에게는 없다. 매년 서울서 친구가 찾아오는 남편이 나보다 훨씬 잘 살고 있는 것 같다.

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 이제야 이 말을 실감하는 나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