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 사람들

출하

윤복순 윤약국약사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다. 우리 포도도 9월 들어 시집가기 시작한다. 자식처럼 반듯하게 잘 키워 최고의 신부 감으로 내 놓으려는 게 모든 농부의 바람일 것이다. 이 바람은 나의 노력 못지않게 날씨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어디 날씨가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던가. 그래서 농사가 다른 것들보다 어렵다.

9시가 다 되도록 남편은 아직 밭에서 출발도 안했다고 한다. 일요일도 없이 강행되는 포도 출하작업이다. 일하는 아주머니들이 지쳐간다. 농번기에 일손 부족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죽하면 부짓갱이도 돕는다는 말이 나올까.

봄부터 지금까지 포도밭 일을 도와주는 두 남자가 있다. 그 둘은 대학 동창으로 남편의 직장 후배들이다. 지금은 따놓은 포도를 작업장으로 날라주고 포장한 포도를 농협에 갖다 주는 일을 한다. 비슷한 듯 다른 듯 일처리에 의견을 내어 애타는 남편의 마음을 살짝 돌려놓는다.

지난 토요일은 식구들이 많았다. 아들과 사위가 벌초를 하러 왔고 사촌 동생들과 작은 아버지까지 오셨다. 여럿이 하다 보니 일찍 끝나 모두 포도밭으로 왔을 때다.

이틀 전에 보낸 포도가 알이 터져 물이 질질 흐르는 것이 나와 농협에서 더 이상 출하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 토요일 출하하기로 한 300여 박스가 취소되었다. 남편이 석 떨어져 있으니 일하는 아주머니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작은아버지도 그냥 가셨단다.

우리 포도는 출하를 못한다는 말을 듣고 낙천주의, 최고의 긍정주의자인 나도 앞이 캄캄했다. 그 많은 분량을 어떻게 다 팔아야할까. 농산물공판장에 매일 300박스씩 낸다고 해도 50일이 걸릴 양이다. 많은 물량에 가격도 싸지고 무엇보다 그렇게 오랫동안 포도나무에 달려있을 수가 없다.

‘아빠 스트레스 많이 받으니 아빠 좀 잘 지켜라.’ 아들에게 전화를 했다. 그렇지 않아도 아들이 급한 마음에 상사 분께 전화를 했다고 한다. 물론 이미 바이어들과 계약이 되어 있어 아들이 전화를 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래도 이럴 때 아들 사위가 남편 곁에 있어서 마음이 좀 놓인다.

출하하기 위해 포장해 저온창고에 넣어둔 포도 해체작업이 일요일에 있었다. 일요일이라서 나도 갔다. 포장지에 포도물이 눈곱만큼이라도 묻은 것은 모두 골라내고 알이 좋은 것으로만 다시 포장해 박스작업을 했다.

남편 얼굴이 편하지 않다. 두 남자들이 재포장하는 곳에 남편은 얼씬도 못하게 한다. 한 남자는 쌓아놓은 포도 상자를 내려주고 나는 검사를 하고 아주머니는 박스에 담고 다른 남자는 포장된 상자를 차에 실어놓는 일을 맡았다.

올해는 날씨가 이상하다. 봄도 없이 여름이 일찍 왔을 뿐 아니라 40도에 가까운 날씨가 계속되어 포도 잎이 타는 일이 벌어졌다. 8월 중순경엔 비가 열흘 가까이 내려 알차게 영그는 것을 막더니 비가 그치고는 갑자기 기온이 떨어졌다. 그래서 포도가 잘 익지 않고 포도색도 들지 않았다.

작년에 비해 포도 익는 속도가 늦다. 추석이 늦다는 것을 포도들도 용케 아는 것 같다. 시절이 늦는 거야 어쩔 수 없지만 기후 탓에 열과가 많이 생겼다.

포도가 익어가면서 알이 터지면 그 단 냄새에 초파리들이 몰려들고 그것들이 포도 속에 알을 낳는다. 그 포도 알이 썩으면서 옆 송이에도 묻게 된다. 그래서 포도가 익어 가면 열과 솎아내는 일을 따로 한다. 해마다 두 번 정도 하는데 올해는 열과가 많아서 세 번이나 했다.

열과를 빼내면 송이가 엉성해진다. 알이 쪽쪽이 박혀있어야 무게도 많이 나가고 포장할 때 알이 떨어지지 않는다. 올해는 열과 자리가 비어있다 보니 알이 꺾이게 되고 그러면 그 자리에 상처가 생기고 그 곳에서 포도물이 흘러 포장지가 젖는다. 포장지가 지저분하니 소비자는 싱싱한 포도가 아니라고 불만을 제기한다. 이번 클레임도 이래서 생긴 것이다.

사람이 하는 일에 실수가 없을 수는 없다. 아주머니들은 당신들이 잘못 포장해 이런 일이 생겼다고 남편 눈치 보느라 많이 주눅이 들어있다. 두 남자는 이럴 때 일수록 억지로라도 기분 좋게 일을 하자고 한다. 시간도 넉넉하니 10분간 휴식이란다. 나도 일을 못하게 포도 상자를 내려주지 않는다.

그렇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고, 죽으란 법은 없다. 여태껏 이런 배짱으로 살았다. 죽을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기죽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영 안 되면 공판장에 반값으로 내면 된다. 다시 어깨를 쫙 폈다.

클레임에 걸려 올해는 우리 포도를 받아주지 않는 줄 알고 걱정했는데 토요일 발주가 취소되었고 일요일은 두 차 분량이 한 차로 줄었다고 한다.

지난번의 불량을 만회해야 하기에 아주머니들은 스스로 잡담 금지령까지 내리고 눈에 불을 키며 포장작업을 했다. 클레임은 잘 걸렸다. 내가 검사를 했는데 썩은 포도 알이 처리되지 않은 것이 다섯 송이나 나왔다. 이것이 그대로 출하됐다면 또 걸렸을 것이다. 일요일도 없이 일하다 보니 능률이 떨어져서 생긴 일일 것이다.

다시 포장되어 나간 포도는 모두 합격을 받았다. 발주도 계속 나온다. 그런데 주문량이 많지 않아 남편 속이 탄다. 제일 예쁠 때 시집을 보내야하는데 그 시기를 놓칠까봐서다.

농사의 어려움에 판매를 빼놓을 수 없다. 모든 제품은 생산자가 원가를 계산해 판매가를 정하는데 농산품은 시장물가에 맡겨진다. 포도는 생물이라서 장기간 보관이 어렵다. 홍수출하 원인이다.

엊그제 때 아닌 우박이 내려 다 익어가던 나락이 길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을 TV에서 보았다. 주인아저씨는 나이가 드셨는데 이런 일은 생전 처음이라며 하늘 무서운 줄을 알았다고 하는 인터뷰를 들었다. 1년 농사가 헛것이 되었다. 내 일 같이 마음이 무겁다.

포도농사에 봄부터 지금까지 자식 키우듯 온 공력을 들였다. 하루에 서너 번씩 옷을 짜서 입어야 할 만큼 땀을 흘렸다. 제 값을 다 받고 출하하는 기쁨을 남편이 누렸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