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복순 윤약국약사

10월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 겨우 컴퓨터에 스피커를 달았을 뿐인데.

전국 여약사대회가 10월에 광주에서 열린다. 그날 저녁 약사들의 장기자랑이 있다. 전북팀은 합창을 할 거라는 연락을 받았다. 연습 시간은 매 일요일 오후 7시부터 9시까지다. 하고 싶은데 차가 없어 전주까지 다닐 수가 없다.

나는 노래를 못한다. 학창시절 음악 실기시험이 제일 어려웠고 점수도 최하위였다. 그런데도 전주까지 가는 동안 동료 약사와 얘기를 나누고, 노래를 배우면서 웃고 즐기는 것이 좋아 해보고 싶었다. 또 이번 참에 단 한 곡만이라도 확실하게 배워 노래 부를 자리가 생기면, 배가 아프지 않고 불러봐야지 하는 야심찬 꿈도 가졌다.

후배에게 부탁해 악보를 구했다. 여약사들만 하는 줄 알았는데 남자약사들이 우정 출연한단다. 혼성 4중창이다.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의 악보가 따로 있다. 김동규의 노래다.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악보를 볼 줄 몰라 노래는 부르지 못하고 가사만 읽고 또 읽었다. 가사가 참 좋다. 이 노래를 혼자서 어떻게 배운다? 알토를 해야 하나?

며칠이 지났다. 다음에 태어나면 성악가가 되고 싶다는 동네 성<兄>에게 악보를 드리며 한 번 불러 달라고 했다. 피아노 반주라도 들으면 모를까 그냥은 못 부르겠단다. “너도 늙어봐라” 한다.

노래 한 번 들어보지 못한 채 또 며칠이 지났다. 딸에게 전화해 그 노래를 다운받아 남편 휴대폰으로 보내달라고 해야 하나, 점심시간마다 노래방이라도 다녀야 하나 생각만 많았다. 이렇게 한 달이 지났다.

후배가 악보를 다시 보냈다. 너무 어려워서 여성파트와 남성파트로만 나누어 부르기로 했다며 새 악보로 연습을 하라고 한다. 조수미, 김동규가 부른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다. 잘 부르는 사람들에게도 어려운 노래인가 보다고 생각하니 조금 여유가 생겼다.

틈만 나면 악보를 보며 가사를 음미했다. 그날도 악보를 보며 손으로 박자를 치고 있었다. 자칭 가수라며 나를 기죽이는 또래의 아줌마가 이어폰을 끼고 약을 사러왔다.

“OO씨 부탁 하나 할까.”

“어머, 약사가 나한테 부탁할 것도 있어?”

그녀도 잘 모른단다.

스마트폰을 꺼내더니 이리저리 찾아 그 노래를 들려준다. 참 좋다. 그녀도  배우고 싶다고 했다. 동지가 생겼다. 그녀는 몇 번 듣더니 바로 따라 부른다.

이만저만 해서 무대에 서야한다고 하니 오디션은 받아 봤냐고 묻는다.

“아니, 입만 뻥끗뻥끗 벌리려고.”

“혼자 한 번 해봐.”

음치에 박치에 영 아니다며 그냥 듣는 걸로 만족하란다. 약사라서 봐 주려고 해도 백 번 양보해도 안 되겠단다. 내 노래 실력은 이리여고에는 음악시간이 없냐는 소리를 듣는 정도다.

후배는 추석명절 후 퇴근길에 들러 멜로디만이라도 불러 준다며 열심히 연습하고 있으란다. 성의가 고마워 나도 흔적이라도 보여줘야겠는데 아직 첫 음도 못 잡고 있다.

남편 휴대폰으로 그 노래를 들을 수 없냐고 하니 노래까지 들으면 요금이 많이 나올 거란다. 남편도 스마트폰으로 바꾼 지 얼마 되지 않아 사용법을 다 터득하지 못했다. 아들이 바꿔주고 돈도 아들이 내고 있다.

아들 내외가 추석 쇠러 내려왔다. 지난번 벌초하러 내려 왔을 때는 그런 생각도 못했는데 이번에 번뜩 컴퓨터로 들을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내 머리는 이처럼 더디게 움직인다.
지금까지의 일을 얘기하니 바로 스피커를 달아주고 프로그램을 깔아준다. 아들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로 언제든지 들을 수 있다며 방법을 알려줬다. 한 걱정 덜었다.

성대모사를 잘 하는 어떤 이가 만 번쯤 연습하니 되더라고 했다. 나도 만 번쯤 듣고 만 번쯤 따라 부르면 들어 줄만 할까.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뒤에 크레용팝의 <빠빠빠>라는 악보가 있다.  가수도 노래도 처음 본다. 아들은 율동을 하기 위해서인 것 같단다. 노래와 율동을 찾아 보여주는데 템포가 빨라 따라 하기 힘들 것 같았다. “엄마 허리 다칠 것 같은데.” 해서 웃었다.

산 넘어 산이라고 했던가. 노래는 입만 벌리고 소리는 내지 않으면 피해는 주지 않지만 무용은 동작이 틀리면 바로 티가 난다. 음치에, 박치에, 몸치까지 정말 쉽지 않다. 되풀이 되는 일상에서 도전해 보려고 한 것만으로도 용기가 가상하다며 나에게 박수를 쳐주고 있다.

여약사대회는 시월 넷째 토요일과 일요일에 열린다. 한 달 남짓 남았는데 무대에 설 수나 있을까. 그 날을 나에게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로 만들고 싶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