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복순 윤약국약사

아침에 일어나니 상쾌했다. 어제 밤엔 감기에 걸리지 않을까 많이 걱정이 되었는데. 음~ 이 기분! 너무 고생스러워 다시는 찾지 않으려 했는데 이 자신감 때문에 오히려 고맙다.

나는 걷는 것을 좋아한다. 대부분은 즐기면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걷는다. 때때로 아직은 젊다는 객기를 부려보고 싶을 때도 있다. 나이를 먹으면서 안전제일주의자가 되었다. 어느새 도전이니 욕심이니 이런 단어들이 내게서 멀어져 간다. 만족이니 성취니 이것도 나의 것이 아니다. 하루하루 큰 일 없이 지내는 것이 그저 고맙고 다행일 뿐이다.

어제는 한 해를 마감하면서 구불길을 걸었다.

구불길은 이리 저리 구부러지고 수풀이 우거진 길을 여유 자유 풍요를 느끼며 오랫동안 머무르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보도 여행길이란다.

익산에서 군산까지 새마을을 탔다. 내가 탄 4호실엔 우리 둘밖에 없다. 객실 한 칸을 전세 내어 여행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거라며 의기양양하게 출발했다. 새로운 걷는 길에 대한 호기심으로 충만했다.

군산역에서 진포시비 공원을 거쳐 채만식문학관에 도착했다. 걷기만 하는 게 아니라 이런저런 볼거리가 있어 재미가 쏠쏠했다. 심심할 만하니 금강하구둑 철새조망대가 나온다.
오성산 정상엔 다섯 성인의 묘가 있다. 당나라 소정방이 이 동네 노인들에게 공주 가는 길을 물었는데, 이 노인들이 공주가 함락되면 나라가 망한다는 것을 알고 알려주지 않아 죽임을 당했단다. 그분들의 묘가 나란히 있다.

나포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폐교한 초등학교를 이용해 만든 식당이다. 3학년 교실로 안내 되었다. 밥도 밥그릇 대신 도시락에 담아 준다. 조그만 센스가 잠깐 동안이라도 추억에 잠기게 했다.
3시가 넘었다. 나포에서 웅포로 이어지는 금강 뚝방길로 들어섰다. 멋진 흙길로 확 트인 시야로 금강은 만조를 이루며 양팔 벌려 환영해 줬다. 그 환영에 답례도 하지 못했는데, 구름이 해를 삼키는가 싶더니 갑자기 강바람이 차가워졌다. 예보에도 없던 눈까지 날렸다.

강바람이 어찌 센지 눈 알갱이가 얼굴을 때리면 볼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마스크의 입김에 눈이 달라붙어 안경이 곧바로 얼었다. 눈보라와 강바람이 뚱뚱한 나도 비틀거리게 만들었다. 날은 어두워지고 길바닥까지 얼었다. 장갑 속으로 오리털파카 속으로 강바람이 숭숭숭 들어왔다.

30대 초반 지리산을 종주했다. 배낭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산장을 이용하기로 했다. 둘째 날 노고단산장에서 세석산장까지 갈 때다. 새벽에 출발해 걷고 걷고 또 걸어도 산장이 나오지 않았다. 산에서는 어둠이 금방 찾아온다. 시력이 좋지 않아 조금이라도 덜 어두울 때 산장에 도착하기 위해 휴식도 없이 걸었다. 해가 쏙 빠질 무렵 어둠 속에 산장이 보이는 것 같았는데. 그리고는 모른다.

웅성웅성하는 소리에 눈을 떴다. 산장지기는 헬기라도 부를까 생각했었단다. 이사람 저 사람들이 나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주었다. 환자라는 이유로 남편 옆에서 잘 수 있었다.

이튿날 아침 나는 어제 밤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아침밥 짓는 것을 돕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괜찮으냐며 걱정을 해 줬다.

“어제 어디서 출발 했어요?”

“노고단 산장에서요.”

“아줌마!, 완전 프로시네. 아줌마 때문에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나는 졸지에 프로 등산가가 되었다. 알고 보니 36Km를 걸은 것이다.

추위가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추위를 이기려 속도를 내어 걸어도 이빨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나는 최면을 걸었다. ‘나는 할 수 있다. 왜? 프로니까.’ 다리에 힘이 붙는 것이 느껴졌다. 바람이 잦아들면서 추위도 약간 누그러졌다. 눈도 그쳤다. 익산시란 푯말이 보였다. 웅포면에 도착했다.
날은 완전히 깜깜해졌고 시내로 들어가는 버스를 어디서 타야할지 모른다. 겨울에 시골에선 사람 만나기가 쉽지 않다. 누구한테 물어야 할지.

언제 올지도 모르는 시내버스를 기다리는데 피로가 밀려왔다. 온 몸이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아침의 의기양양함은 어디로 출장을 갔을까. 신발이 젖어 동상이라도 걸릴까 하나 둘 셋 넷하며 차가 올 때까지 뛰었다.

남편은 점심 먹고 집으로 가자고 했는데 내가 고집을 부려 비단강길을 걸었다. 나는 추워도 춥다는 말도 못하고 미끄러워도 깜깜해도 눈 속에 발이 빠져도 씩씩하게 걸어야만 했다. 감기라도 걸리는 날엔 남편의 지청구를 어떻게 다 듣겠는가.

걸으면 몸의 소리를 듣게 되고, 지친 몸과 마음도 살아나고 잃어버린 자신도 찾게 해 준다.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고 삶을 풍요롭고 여유롭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걷고 있으면 행복하다. 무뎌진 마음도 열어준다.

눈보라와 강바람과 초행의 긴장 속에 8시간 넘게 걸었는데도 아침에 일어나니 지리산에서 그랬던 것처럼 내 몸이 쌩쌩했다. 오랜만에 해냈다는 기분을 만끽했다. 이 자신감으로 새해를 맞을 것이다. 나는 아직 쓸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