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복순 윤약국약사 

포도농장 밭둑에 무궁화를 심으러 갔다. 바람이 다르고 햇볕이 다르다. 흙에서도 살아있는 냄새가 난다. 겨우내 얼었다 녹았다 반복하더니 새싹들이 흙을 떠들고 일어나기 쉽게 부슬부슬해져 있다. 그 틈새를 놓칠세라 들풀들이 뾰족뾰족 새 잎을 풀어 놓았다. 봄은 생명의 계절임이 틀림없는 것 같다.
한 달 전 쯤 딸이 힘이 없는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엄마, 나 임신이래.”
순간 나도 놀랐다. 딸은 이미 애가 셋이다. 축하한다는 말이 쉬 나오지 않았다.
큰 놈이 손자고 밑으로 둘이 손녀다. 사위가 딸들 둘이 잘 노는 것을 보고 아들 하나 더 있으면 좋겠다고 한 모양이다. 요즘 우리나라의 출산율이 세계적으로 최하위라고 한다. 너도 나도 편한 것을 쫓다보니 결혼도 늦어지는데다, 결혼을 해도 아기는 낳지 않으며 심지어는 결혼을 기피하는 현상마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세상에 넷째를 가졌다는 게 대견했다.
예전에 나도 애기를 둘 낳고 안 낳으니 친정어머니는 하나라도 더 낳으라고 하셨다. “다 저 먹을 것은 갖고 태어난단다. 어디 니가 키우냐? 세월이 키워주지.” 그랬었다. 그 때 나도 아마 편한 것을 따랐을 것이다. 세월이 흐른 다음 애들이 대학에 들어가 집을 떠날 때서야 셋째가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런 생각을 했었다.
나는 그만 정신을 가다듬고 딸에게
“축하한다. 그리고 대단하다. 우리 딸 정말 인간승리네.”
몸조심하고 잘 챙겨 먹으라고 당부를 했다. 예전에 어머니가 나에게 하셨던 말을 상기하며 딸에게 그대로 해 주었다.
딸이 지금도 육아 때문에 전쟁을 치르듯 사는데 앞으로 얼마나 고생을 할까 걱정이 앞섰다. 4년여의 육아 휴직을 마치고 복직해 겨우 2년을 근무한 터였다. 애가 셋이라는 이유로 담임도 맡지 않았다. 
고만고만한 손자 손녀들과 고생할 딸을 생각하다 새 포도밭 장만했을 때가 떠올랐다. 포도농사의 재미를 한창 알아 가는데, 포도밭이 3년 전 산업단지로 수용 되었다. 겨우 5~6년 농사를 짓고 그만 두게 되어 아쉬움이 많았다. 남편이 50줄의 나이에 농대를 다니며 제2의 인생을 꿈꾸며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복병을 만난 것이다.
나는 직장생활 30여 년, 준비기간까지 포도농사 10여 년 했으면 이제는 쉬어도 된다고 했는데 남편은 다시 밭을 구입했다. 규모가 크다. 산, 밭, 논 등을 사서 만들다보니 그 경사가 있어 3단 밭이 되었다. 남편은 그 밭둑에 무궁화를 심고 싶어 했다.
설 연휴 때 딸 아들 내외가 다녀가고 자투리시간이 생겨 가까운 수목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수목원 울타리를 무궁화로 만든 곳이 있다. 가지치기를 했는지 바닥에 잔가지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남편은 횡재라도 한 듯 신바람이 나 줍기 시작했다. 양이 많아 다음날 새벽에 다시 주워 왔다.
무궁화는 삽목하기 쉽고, 추위에도 강하며, 나무가 건강해 특별히 좋은 환경이 아니어도 잘 자란단다. 주워온 무궁화를 날이 풀릴 때까지 우선 가이식해 두었었다.
옛 부터 중국에서는 우리나라를 무궁화가 많은 곳이란 의미로 근역, 근화향이라 불렀단다. 무궁화는 중국에서는 군자의 기상을 지닌 꽃으로, 서양에서는 그들의 이상인 샤론의 장미라 하여 무척 사랑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장원급제 때 무궁화를 꽂았고, 혼례씩 때 입는 활옷에 무궁화 수를 놓았다고 한다. 활옷의 무궁화는 다산과 풍요를 의미 한단다.
10여일이 지난 뒤 딸이 또 기운 없는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나, 쌍둥이래. 일란성.” 
“···”
이번에도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육아휴직을 낸다고 해도 한꺼번에 둘을 어떻게 키운다? 순간 어느 해 사위까지 육아휴직을 낸 적이 떠올랐다. 그렇다, 최선의 방법을 찾다 보면 분명 길은 있을 것이다.
새 포도밭도 산에는 잡목이 우거져 있고, 논은 푹 꺼져있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몰랐었다. 그러나 흙을 깎을 곳은 깎고, 돋을 곳은 돋우고, 나무들도 벨 것은 베고 옮길 것은 옮겼다. 그리고 밭 둘레에 철쭉과 단풍나무도 심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제법 밭의 모양새를 잦추었듯, 딸에게도 좋은 방법이 있을 것이다.
학교에서 3월은 제일 바쁜 달이란다. 하루 종일 동당거려서인지 하혈이 있어 병원에 갔더니, 유산 할 수 있다며 절대 안정을 요한다고 하더란다. 학교에서도 바로 병가 처리를 해 주었다고 한다. 나는 쌍둥이가 효자라며 네가 언제 이렇게 편안하게 쉴 수 있겠냐며 딸의 기분을 띄워 주었다.
딸은 이제는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처음엔 걱정이 많았는데 닥치지도 않은 걱정을 미리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기로 했단다. 저한테 생겼으니 제 뱃속에 있는 동안 건강하게 키워주고 그 다음은 그 때 생각해도 충분하단다. 내 딸이 어른 같다. 다섯 아이의 엄마가 될 자격이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무궁화도 잘 자랄 것이란 믿음으로 밭둑에 하나하나 심었다. 무궁화는 새벽에 피었다 오후가 되면 오므라지기 시작해 저녁때가 되면 떨어지지만 내일 새벽이면 새로운 꽃이 또 핀다. 계속해서 핀다고 해 무궁화란다. 쌍둥이들도 하루하루가 다르게 자라며 날마다 새 꽃이 피듯 예쁜 짓을 더해 갈 것이다.
무궁화꽃잎이 다섯 장, 내 딸네 아이들이 다섯 명, 무궁화가 나라의 꽃이니, 그 아이들이 신체도 정신도 건강한 우리나라의 큰 일꾼으로 자랄 거라는 기대를 하며 마치 무궁화가 내 손자들인 양 정성을 다해 심었다.
‘무궁화야 무궁화야 잘 자라라.’ 햇빛이 바람이 땅이 밭둑의 무궁화를 키워내듯 부모가 사회가 나라가 내 딸의 아이들을 무궁무궁하게 키워 줄 것이다.
3단의 밭둑에 무궁화를 가득 심었다. 온 밭에 봄기운이 가득하다. 생명의 소리가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