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김명국은 인조임금때 사람으로 어느 집안 출신인지 모르지만, 자기 호를 연담蓮潭이라 했다. 조선통신사 수행원으로 일본에 두 번 다녀올 정도로 일본에서 인기가 높았다. 그는 또 술에 대취해야만 붓을 들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 그에게 영남에 사는 스님이 큰 비단을 가지고와서 명사도를 그려달라고 부탁을 했다. 스님은 비단 수십필을 그림값으로 가져왔고, 김명국은 좋아라 받아서 아내에게 넘기며 당부했다. “이걸 가지고 술 값을 삼게, 내가 몇 달동안 신나게 마실 수 있도록 말이야.”

그런 얼마 뒤에 스님이 찾아오자 “맘이 내켜야 그린다.”며 그냥 보냈다. 그렇게 서너번 돌려 보내더니, 하루는 술을 실컷 마시고 몹시 취해 비단 앞에 앉았다. 한참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붓을 들어 단번에 그림을 다 그렸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건물모양이며 귀신들의 형색이 삼엄하긴 했지만, 머리채를 끌고 가는 자나 끌려가면서 형벌을 받는자, 토막으로 베어지고, 불에 태워지는 자, 절구 찧고 맷돌 가는 자들이 모두 스님들이었다.

이를 본 스님이 깜짝 놀라 말했다. “아이고 참! 당신은 어쩌려고 내 큰일을 그르쳐 놓으셨소?” 이에 김명국이 태연스레 두 발을 앞으로 쭉 내뻗고는 웃으며 말했다. “스님들의 일생동안 저지른 억압이 바로 세상을 미혹시키고 백성을 속이는 짓이니, 지옥에 들어갈 자는 스님들이 아니고 누구겠소?”

스님이 화가나 말했다. “그림은 태워버리고 비단이나 돌려주시오.”

김명국이 웃으며 말했다. “스님이 이 그림을 완성시키고 싶다면, 가서 술이나 더 사가지고 오시오. 내가 스님을 위해 그림을 고쳐주겠소.”

스님이 술을 사오니 김명국이 술잔에 가득부어 마시고는 기분좋게 취해서 붓을 쥐고는 머리 깍은 자에게는 머리털을 그려주고, 수염 깍은 자에게는 수염을 그려주었다. 또 잿빛 옷을 입은자와 장삼을 입은 자에게는 채색을 하였다. 잠시 뒤에 새 그림이 만들어지며 붓 놀림이 더욱더 세련되어 할 말이 없었다.

그림이 완성되자 붓을 던진 뒤에 다시 크게 웃으며 잔에 술을 가득 부어 마셨다.

스님들이 둘러서서 그림을 보며 “당신은 참으로 천하의 신필神筆입니다.” 하며 감탄하더니 절을 하고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