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성장포럼대표

前익산경찰서장

김성중

이리농림학교 한하운을 깨우자

김성중 익산성장포럼대표

시인 이종석은 한하운 시인을 추억하며 시를 씁니다.

보리피리 불며 불며
지나간 것은 아름답다고 했다
나는
한하운을 만나러 전라도 길을 간다
 
전라도 소록도를 가는 길에
하운이 적을 두었었던
이리농림학교를 들렸었다
지금은 그곳이 익산대학교가 되었다

그 학교 교정의 하운의 시비에서
필닐리 필닐리 푸른 보리피리의
노래가
들리는 것 같다

함흥 땅을 떠나 이곳까지 와서
청운의 꿈을 불태웠었던 하운이여
그대의 너털 웃음이 지금 들리는 것 같다
아, 방랑의 기산하(機山何)여

한하운의 본명은 ‘태영’입니다. 1920년 3월 10일 함경남도 함주군 동천면 쌍봉리에서 한종규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함경남도 부호의 외동딸로 17세에 다섯 살 어린 아버지와 결혼했습니다. 아버지 집안은 3대가 과거에 급제한 선비 집안으로 지방의 지주였다고 합니다. 태영은 7세에 함흥으로 이사해 함흥 제일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우등생으로 음악과 미술에 뛰어난 재질을 보였고,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6세에 이리농림학교(현 전북대학교 익산캠퍼스) 수의축산과에 입학했습니다. 당시 이리 농림학교는 국가기관에서 세운 식민지 유일의 5년제 학교로 부호와 지주의 자식들이 많이 입학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일생을 바꾼 계기가 된 1936년인 17세 때 그는 한센병 확정 진단을 받게 됩니다. 그의 인생 역경은 이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나의 슬픈 반생기(인간사, 1957)’에서 한하운은 ‘진찰이 끝난 뒤에 조용한 방에 나를 불러놓고 마치 재판장이 죄수에게 말하듯이 문둥병이라 하면서 소록도로 가서 치료하면 낫는다고 걱정할 것 없다고 하였다. 나는 뇌성벽력 같은 이 선고에 앞이 캄캄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리 농림학교 학적부에 한하운은 1935년 입학해 1940년 졸업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학창시절 문학과 창작활동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발자크와 앙드레 지드, 헤르만 헤세 등의 번역소설을 탐독하고 시를 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문학의 꿈을 키워가던 이리 농림학교 시절,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 시절에 받은 청천벽력같은 문둥병 확진, 그 후 치료를 병행하며 학교를 졸업하기까지의 3년여의 좌절과 희망은 그의 시심(詩心)의 발판이 되었을 것입니다. ‘문둥병 시인 한하운’은 우리 익산에서 그렇게 탄생하였습니다.

1922년 이리 농림고등학교로 개교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춘 전북대 익산캠퍼스는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교정이 아름답습니다. 이리 농림학교 본관은 1963년에 건립된 건물로 독창성과 아름다움을 인정받아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지금은 후문이 된 옛 정문을 지나서 왼쪽 숲길로 들어서면 한하운의 시비(詩碑)를 만날 수 있습니다. 1997년 5월 5일에 이리농공전문대학 총동문회원 이름으로 건립된 이 시비 전면에는 시인의 대표작 ‘보리피리’가 실려있습니다.

한하운 시인은 ‘보리피리’를 비롯해 ‘파랑새’,‘전라도 길’ 등 다수의 시가 있습니다. 유리걸식하며 삶의 애환을 담은 한(恨)의 시들은 지금도 우리의 마음을 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하운은 당시 문단의 비주류였으며 이병철이라는 월북 시인에 의해 시인이 됐다는 점에서 색깔론도 제기됐습니다. 이러한 점 때문에 한하운은 제대로 평가조차 받지 못한 유령 시인이 됐습니다. 최근, 그가 인생의 후반전을 지낸 인천 부평과 경기도 김포에서 시인을 재조명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부족합니다. 한 많은 시심이 태동한 우리 익산에서부터 그의 발자취를 먼저 살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익산에서 당장 한하운을 깨워야 합니다. 그의 시심에 모티브를 제공한 익산에서의 발자취를 찾아내고 복원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고은 시인은 중학생 시절 하굣길에 우연히 주운 '한하운 시초'를 읽고 그처럼 처절한 시 몇 편을 쓰고 죽겠다고 다짐했다며 한하운의 삶과 시가 살아 있는 생활의 시를 배울 수 있는 '한하운 학교'가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시인의 인생 역경이 시작된 학창시절을 기억하며 우리 익산에 ‘한하운 학교’를 세웁시다. 시가 살고 시인이 살아야 합니다. 문화예술이 살고 문화예술인이 살아야 합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 익산이 진정한 의미의 ‘품격있는 도시’가 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